두발 자유화 사라져가는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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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 자유화 사라져가는 이발소
  • 경철수 기자
  • 승인 2005.04.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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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우암동서 33년째 라미라 이발관 지킨 이웅열씨 삶

그동안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버리고, 떠나보내야 했다. 우리도 한번 폼나게 살아보자고,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우리는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다 버리며 살아왔다. 따라서 이제 우리 곁에는 그 옛날 고향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아스라한 추억의 풍경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이에 본보에서는 우리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추억의 풍경'들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30대 중반 만 돼도 희디 흰 가운에 머릿기름 바르고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동네 이발관 아저씨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다.

또 부모님과 선배들 입담 속에서도 어김없이 못살고 배고프던 시절, '이'잡고 머리깍던 이야기에서 부터 두발 단속에 걸려 까까머리 되던 학창시절 이야기까지 연신 이어지곤 한다. 그런데 어느덧 이런 이야기 속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던 동네 이발관이 사라지고 있다.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청암 어린이 놀이터 주택 골목에서 벌써 33년째 '라미라 이발관'을 운영 해 오고 있는 이웅열(56) 이용사는 '두발 자유화'와 '이발업 신고제'가 사양길을 불러 왔다고 말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뀐 이발업이 우후죽순 생겨나다가 유행에 민감한 학생들이 미용실을 선호 하면서 동네 이발관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

   
이씨는 "한 때 동네 이발소와 미용실은 1대1의 비율이었으나 이제는 1대8이 된 것 같다"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초등학생들은 머리깎는 곳은 미용실이고 이발관은 뭐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

이씨가 운영하는 '라미라 이발관'은 아직도 70년대 후반의 이발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지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의자만 현대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목욕탕에서나 볼수 있는 타일을 밖에까지 붙여 놓은 것도 보기 드문 광경이지만 이발이 끝난 뒤 엎드려 머리를 감던 옛날 이발관 세면대도 그대로이다.

이씨는 22세 때 옆 동네인 내덕동 '새나라 이발관'에서 이발기술을 배운 것이 이발 인생의 시작이다. 5남매의 맏형으로 태어나 동생들 분가에서부터 80노모까지 모셨다. 그리고 라씨 주인집으로부터 세들어 시작한 이발업이 60평짜리 집을 장만했고 3남매 공부도 다 시켰다.

이씨는 "무일푼으로 뛰어 들어 10환 15원의 일당을 받으며 힘들게 생활하던 일들이 어느새 한달 4만원의 월세에 하루 40만원의 순수익을 올리는 곳이 돼 있었다"며 풍요롭던 80년대 초반 이야기를 전했다.그러나 "길가던 초등학생이 '이발관이 뭐 하는 곳이야'라고 엄마에게 묻는 것을 보고 세상이 변한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씨는 "네온사인 하나 없이 페인트로 색 칠된 가게 상호가 말라서 너덜거리는 '라미라 이발관' 간판이 부끄럽다"며 한사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세번을 찾아가 들은 사연은 "라씨 성을 가진 집주인이 아들에게 차려 준 이발관 이름이 '라미라'였고, 라씨의 아들은 인천에 다른 직업을 찾아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이제껏 자신이 월세를 주며 운영해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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