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그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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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그 향기
  • 정명숙
  • 승인 2005.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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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찿아가기로 한날. 싱그러운 봄바람이 온몸을 간질이며 바람목욕을 시켜주고있다. 오랜만에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시골길을 달린다. 목적지가 어디든 떠난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은 설레고 흥분된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것은 이심전심인가보다. 모두가 소년소녀의 해맑은 모습들이다.

인적이 드문 산길로 접어들자 창밖으로 보이는 숲속은 순정처럼 피어나는 연초록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그 순진스러움으로 산골짜기를 이내 장악해 버리는 솜씨는 역동적이기도 하다. 작은 개울가 옆에 내려서서 들뜬 기분으로 행복감에 젖어 바라보는 산속의 경치는 가히 신의 향연이라고 할만하다

. 겨우네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던 산은 따스한 햇볕과 살랑거리는 바람에 못견디고 저리도 화사하게 싱그럽게 피여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빠져들고 있었고 정말로 황홀한 것은 감상자로 남겨두지 않는 작은 들꽃들의 향기였다. 노란 양지꽃. 보랏빛의 제비꽃. 노란 민들레꽃과 보기드문 하얀 민들레꽃. 그러나 나를 아련한 유년시절로 유혹하는 것은 오솔길 옆에 지천으로 돋아있는 쑥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쑥을 뜯기 시작했다. 줄기는 옅은 갈색빛이 감돌고 잎의 색깔도 앞면은 짙은 녹색이지만 뒷면에는 흰색의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들국화나 인진쑥 모두가 비슷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똑같이 먹는 쑥으로 보인다.

쑥 한 웅큼을 들고 향긋한 냄세를 맡고 있자니 하얗게 바랜 광목 앞치마를 허리에 매고 서 있는 새 색씨 같던 친정어머니의 고운 얼굴이 쑥위에 겹쳐진다. 해마다 이맘때즘이면 어머니는 하얀 앞치마를 매고 동생을 등에업고 들로 나가셨다. 들판 한가운데 평평한 곳에 포대기를 깔고 동생을 뉘어놓고 앞치마를 반으로 접어매고 쑥을 뜯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뜯다보면 어느새 앞치마속은 불룩해지고 그러면 그것을 끌러 보자기처럼 싸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신다. 그리고 쑥을 삶아 꼭 짜서 소금과 사카린으로 간을하고 밀가루로 버무려서 커다란 무쇠 솥에 채반을 얹고 쪄주면 그것은 식구들의 한끼 식사가 되었다.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도 않고 맛이 있었던 쑥 버무리가 어머니에게는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이었을테지만 내게는 아련한 추억이다.

일찍 혼자되신 할머니가 삼촌과 고모를 도시로 보내 학비를 대자니 농사만 지어 생활하던 시절이라 항상 궁핍했던 봄날이었다. 쑥은 그 봄날의 상징이었고 부드럽고 어린쑥은 “애쑥”또는 “참쑥”이라 불리며 식구들의 영양 공급원이 되기도 하였지만 초여름에 뜯어말린 쑥은 약초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코피를 자주 흘렸던 내게 할머니는 마당끝에 나있던 쑥을 뜯어 손으로 비벼 코를 막아주면 신기하게도 금방 지혈이 되었고, 복통이나 토사가 날때도 말린 쑥을 다려 먹이셨다. 위장병이 심했던 아버지는 해마다 겨울이면 말린 쑥으로 조청을 만들어 아주 맛있는 듯이 드셔서 어린 나는 조청을 한 수저 퍼 먹고 그 쓴맛에 물을 한도없이 마셨던 기억이 달콤하다.

지금도 나는 봄이되면 냉이보다 쑥을 먼저 뜯는다.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던 쑥 버무리를 만들고 된장 풀어 팔팔 끓는 국물에 콩가루 솔솔무친 쑥을 넣어 쑥국을 끓인다. 맛과 향기에 취해 먹기도 하지만 유년의 추억에 젖어 먹을때가 더 많다. 봄에 생일이 들어 있는 내게 어머니는 쑥을 넣어 인절미와 절편을 해주셨다. 여자는 시집가면 생일도 제대로 못 얻어 먹는다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챙겨주시던 것이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연례행사처럼 치르시는 봄의 쑥 잔치이다.

햇볕 따스한날 늙으신 친정어머니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한끼 식사가 아닌 쑥을 좋아하는 딸의 생일 떡을 만들기 위해 들로 나가실것이다.

오늘 포근한 봄바람 속에 개울가 오솔길을 걸으며 유년에 맡았던 봄날의 쑥 내음에 아득하던 동심의 그리움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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