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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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신드롬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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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 환(충북민예총회장/충북대교수)
   
한국인들이 황우석 교수에 열광하고 있다. 국민과학자, 위대한 한국인, 국가를 빛낸 인물, 노벨상 수상후보 등 그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어린이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황우석 교수를 칭송하고 찬양한다.

천주교와 성균관에서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행위로 비판을 했을 뿐이고 민노당에서 심각한 우려를 한 정도다. 물론 한 과학자가 성실하게 연구하고 명석하게 정립한 과학적 결과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 한국인들이 황우석 신드롬이라고 할만큼 열광하는 이유가 난치병 치료와 같은 인도주의적 발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이 황우석 교수를 칭송하는 것은 <위대한 한국>을 실현하는 과학자라는데 있다.

그를 한국이라는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대표 국민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성과에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다>의 신화(myth)가 드디어 <세계를 제패했다>는 식의 감격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이 현상은 말할 것도 없이 무척 위험하다. 현재 한국인들의 열광은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 열망에 더하여 황교수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는 국경이 있다’라는 신념으로 애국주의에 보답했다.

다행히 황우석 교수에 대한 한국인들의 수준은 아직 열광이라고 진단되지만 내면에 잠재해 있는 광기(狂氣)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이나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황교수는 신과 자연의 영역에 도전한 셈이다. 이 도전이 위대한 인류의 진보인지, 재앙인지는 훗날 판명이 되겠지만 거스를 수 없는 과학의 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가 멈추지 못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광속도의 현란한 상황 속에서 과학과 종교/윤리의 대혈전(大血戰)이 열광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황교수의 업적은 그 대리전인 것이다.

과학기술은 승리할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양태가 변할 것이다. 탄생이나 죽음도 바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보는 것과 같이 초시간적, 초공간적 생존이나 복제가 가능한 세상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간을 앞당기느냐, 늦추느냐다. 줄기세포의 증식과 배아는 필연적으로 생명복제로 나간다.

생명의 존재가 과학에 의해서 결정되는 셈이다. 이 때 인간, 아니 인류는 과연 ‘나는 무엇인갗라는 정체성 혼란에 빠질 것이다. 물론 영악한 인류는 새로운 정체성, 즉 ‘과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결국 황교수의 연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절대과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며 윤리, 철학, 종교, 예술 등과도 !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우석 신드롬은 국가주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애국주의에서 발원했다. 애국주의는 자국가중심주의라는 오류를 낳는다. 위대한 한국, 사천년의 찬란한 조국과 같은 구호가 인식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 위대한 한국의 상징으로 황우석 교수가 놓여 있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과학 기술에 뒤떨어지고 강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했던 고통에 복수하려는 심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황우석 교수는 과거의 한국을 구하는 쟌다르크로 투사(投射)된다.

황우석 신르롬의 가장 큰 문제는 인도주의적 관점, 인간주의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신드롬에서는 오로지 한국의 과학자가 미국이나 독일도 하지 못하는 생명과학의 신기원을 열었다라는 것만 강조된다.

그 내면에는 위대한 한국, 세계 최강의 과학한국, 성장과 발전이 가능한 나라라는 희망이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본격적인 국가주의가 작동된다. 또한 여기서 황우석과 한국이라는 국가의 내밀한 공모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황우석 교수의 과학적 성과는 훌륭하다. 한 개인과 팀의 극한적 노력에도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과학정신과 위대함도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열광, 냉정함을 상실한 광기, 무조건 성장발전이 최고라는 생각, 미국을 이겼다는 유치심 등은 위험하다.

우리가 깊이 성찰할 것은 존재론적 자의식이다. 내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인간은 동물성의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한국 사회의 귀한 보배인 황우석 교수를 통하여 인간적 성찰이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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