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10-24 23:19 (토)
수암 권상하의 황강영당
상태바
수암 권상하의 황강영당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6.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천시<5>

황강영당은 월악나루에서 남쪽으로 1㎞여 떨어진 송계계곡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수암 권상하 선생의 유적지이다. 황강영당은 본래 영조 2년(1726)에 건립되고, 그 이듬해 사액을 받은 서원이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서원이 훼철되자 그 자리에 송시열·권상하·한원진·권욱·윤봉구 등 다섯 분의 영정을 모시는 황강영당을 건립하였다.

   
▲ 황강서원 묘정비
원래의 위치는 한수면 황강리에 있었지만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자 1983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황강영당은 원래 수암이 생전에 쓰던 서재로 한수재를 후에 영당으로 만든 것이다. 영당의 처마에는 스승인 송시열이 직접 내린 한수재(寒水濟)라는 편액이 있다. 이는 '가을달이 한수에 비추었다'라는 주자의 시에서 따다 한수재라는 세 글자를 써준 것으로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권상하는 평생을 스승이 내린 한수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한수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황강영당에는 공자집(工字家) 형태로 된 고택이 있다. 배치 형태가 H자 형태로 되어있어 工字집이라고 한다. 영당 앞 담밑에는 정조 21년(1797)에 세운 황강서원 묘정비와 이보다 70년 앞선 경종 원년에 세운 수암선생구택지비가 있다.

   
▲ 우암의 글씨로 전하는 한수재 현판과 황강영당 현판(아래)
수암사는 황강영당과 일각문 사이에 만든 권상하의 사당으로 선조 7년에 창건하였고, 기와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 맞배집으로 1975년 단청 보수하였다. 이곳에는 수암선생이 사용하던 벼루가 아직 남아 있다. 이곳에 권상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이태모의 모사본으로 크기는 중형으로 한폭의 초상은 65㎝×86㎝ 크기의 반신상이다. 견본 채색한 전형적인 원체풍의 기법이며 문순공한수재권선생진상이라 묵기(默記)가 있는 75세때의 영정이다. 여기에는 송시열의 영정도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 78세 때 그려진 진상은 62㎝×90㎝ 크기로 반신상 견본채색인데 김창업 그림, 채지홍 글씨이다.

수암 권상하는 근세 유학의 중창자로, 송시열의 수제자였고, 기호학파의 지도자였다. 그는 인조 19년(1641)에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서 사헌부에 속한 정삼품 집의(執義) 벼슬을 한 권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다르고 독서를 좋아해 송시열·송준길 문하에 들어가 사사, 송시열의 신임을 받는 수제자가 되었고, 스승으로부터 '자기의 뜻을 이어달라'는 의미의 수암(遂菴)이란 호를 받았다.

   
▲ 황강영당을 관리하는 수암 11대손 권성중씨.영당을 옮겨오기전 황강리에 있을 대는 수암구택에서 직접 생활하였다고 한다. 한수재 현판은 분실을 우려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송시열의 가장 큰 제자이며, 그의 대통을 받은 권상하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인조 19년(1660) 진사에 급제했으나 1659년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로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관작을 추탈당하고 유배되어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고향인 황강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쓰는 한편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며, 정주(정호·정이·주희)의 서적을 교정했다. 후에 다시 우암이 제주에 안치되고, 임금의 친정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자 달려가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수거해 돌아왔다.

수암은 우암의 유언에 따라 숙종 30년(1704) 임진왜란 때에 원군을 보내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는 만동묘를 화양동에 세웠다. 또 숙종의 뜻을 받들어 같은 해 명나라의 태조·신종·의종을 제사지내는 대보단을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

   
▲ 황강영당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들. 왼쪽부터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 병계 윤봉구, 초당공 권욱

권상하는 서인과 남인간의 치열한 붕당기에 살면서도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서경덕·이황·기대승·이이·성혼 등 앞선 유학자들이 제기한 성리학의 기본문제를 새롭게 검토하여 철저하게 규명하려 했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에서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숙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한 권상하는 평생을 초야에 묻혀 후학을 기르며 학문만을 탐구한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 공(工)자형의 수암선생 구택, 구택지비
그의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채지홍·이이근·최징후·현상벽·성만징 등이 있는데 이들이 곧 강문팔학사( 江文八學士)이다. 권상하는 81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당시의 사상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다 할 학문적 진전이 없이 혼미해가기 시작하던 성리학 이론을 ‘호락론’으로 불러일으킴으로써 최근세 유학에 있어서 융성의 바탕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한수재집』, 『삼서집의』가 있는데 특히 『한수재집』은 조선 후기 유학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문헌이다. 권상하는 죽은 뒤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는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 속실에 있으며, 묘역은 약 20평 정도의 크기이다. 상석이 있으며 망주석이 1조 있고 우측으로 1845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1. 호락논쟁(湖洛論爭) :
조선 후기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도 한다.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은 주로 호서지방 학자들이, 인물성상동론(人物性相同論)은 낙하(洛下:서울지방)의 학자들이 주장했기 때문에 호락논쟁이라 하였다.

2. 강문팔학사: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여덟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권상하가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지금의 충북 제천군 한수면)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강문(江門)이란 말이 붙게 되었다.

3.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구별되는 이이(李珥)의 대표적인 학설이다.

4. 권상하의 유학이론:   
권상하는 이이를 시조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으며, 그의 문인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편재문제로 논쟁을 하자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낙론학설을 반대하고,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호론학설을 지지, 기호학파를 두 갈래로 갈라놓기도 했다. 물질적인 기(氣)는 다시 정신적인 이(理)의 영역에까지 미쳐 이(理)가 활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수제집권 21』에서 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심이 형기의 사에서 생긴다고 할 때, 기는 이목구비를 가리킬 뿐이다. 또한 칠정(七情)이 기에서 발한다고 하면 기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비록 글자는 같으나 가리키는 바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인과 물은 성이 동일하다는 낙론의 학설에 대해 인과 물은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호론학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양분되었다. 이는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에서 발전, 기를 형기와 이기로 분류한 새 이론이다.

 

충청리뷰를 응원해주세요.
'올곧은 말 결고운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