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10-31 17:40 (토)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상태바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7.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주시<1>

   
▲ 충주향교 전경. 외삼문 우측으로 선정비가 보인다.
충주시 교현1동에 있는 충주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 계명산 아래에 창건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서 양무가 있고, 강학하는 명륜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내삼문. 가운데 있는 문은 신문(神門)이어서 신만이 드나들 수 있다. 사람은 좌우측문을 이용해야만 한다.
전형적인 전학후묘식 배치를 따르고 있다. 경사진 지형을 남향 2단으로 정지한 후 그 첫째 단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소슬삼문 형식의 외삼문이 배치되고, 그 뒤로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동재와 서재는 소실되어 빈자리로 남아있고, 우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비각이 최근에 축조되었다.

둘째 단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내삼문을 두고 있으며, 그 뒤로 개방형인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또 중심축의 좌·우측으로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동·서 양무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충주학교는 동·서무가 정면 7칸으로 장중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건물로 그로 인해 가운데의 공간이 매우 넓어져서 묘역공간에 치중한 느낌을 준다.

   
▲ 명륜당. 최근에 단청을 화려하게 입힌 정면 5칸의 건물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정면 5칸 중 양쪽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3칸은 통칸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고 있다. 5량집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면 1칸을 퇴로 개방한 개방형이며, 그 내부를 통칸으로 구성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있다. 7량집으로 홑처마 맞배기와 지붕을 이루고 있다.

   
▲ 대성전
향교의 외삼문 좌측으로는 호성사(護聖祠)라는 색다른 사당이 있다. 호성사에 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인하여 충주향교가 불에 타자, 당시 충주읍리였던 석천수(石天壽)와 그의 숙부인 석감(石鑑)이 성현들의 위패를 심항산(心項山, 지금의 계명산)으로 옮기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잘 지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 75년(서기 1629)에 지금의 위치에 문묘를 이건하고 성현의 위패를 다시 봉안하였다.

이러한 공을 세운 석씨숙질(石氏叔侄)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찬양하기 위하여 숙종조에 지방 유림들이 호성사를 건립하고 석씨숙질(石氏叔侄)을 합사하여 매년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 정면7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1.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
교촌·교동·교리·향교동·교운리·교성리·교흥리·교월리·교원리·대교리·교사리·교평리·교현동 등 충주의 많은 지명은 향교와 관련이 있다

2.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
충주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7년(162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건립하였는데 고종 광무1년(1897)과 1936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36년 전석영 군수가 명륜당과 외삼문을 새로 지어서 오늘에 이른다.

   
▲ 호성사와 신위(오른쪽)
3.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 :
7세기 신라 때 유학자이며 대문장가로 문명을 떨쳤던 강수는 충주 사람으로 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교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을 꿈에 보고 낳았는데 실제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머리에 뿔이 솟아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현인에게 물으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했다 한다. 강수라는 이름은 후두골이 유난히 높았던 그의 골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통일 시기인 문무왕 때 외교문서를 잘 다루어 삼국통일에 공을 세웠으며 김인문이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는「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라는 표문을 지어보내니 당나라 고종도 그 글을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김인문을 신라로 보내주었다 한다. 청년 시절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에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라.”라고 만류하였다. 그러자 강수가 답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거절하였다 한다. 강수가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이 해마다 조 1백 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 강수는 외교문서로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6두품인 사찬의 관등과 조 증봉을 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 지내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으나 모두 불사에 공양했다. 그리고 강수의 아내가 생활이 곤궁하여 향리로 돌아가려 하자 대신이 이를 알고 왕에게 고하여 조 1백 석을 주게 하였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강수는 신라사회 6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 등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신흥의 유교 관료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유교적 문인으로 의의가 크다. 

충청리뷰를 응원해주세요.
'올곧은 말 결고운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