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3> - 충주시<3>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약 3㎞ 쯤 가면 칠금동 산 1번지,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에 탄금대가 있다. 신라 제일의 악성 우륵과 조선조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순절한 곳으로 명승지요, 역사가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노래비. | ||
지방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탄금대의 동북쪽 정상에는 토성이 남아 있다. 이 곳은 강물을 바라보고 대문산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성은 흙으로 쌓았지만 많은 강돌을 주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축성할 때 가까운 강의 돌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보여진다.
토성의 둘레는 약 400m이나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120여m이며 삼국시대 토기편들도 보이고 있다. 이 성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대동지지를 살펴보면 진흥왕이 낭성에 들러 하림궁에서 우륵과 그 제자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므로 낭성은 탄금대에 있었거나 아니면 충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진흥왕 12년(551년)의 일인데 이때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국원경을 빼앗음으로써 한강유역으로부터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고 북진의 기초를 닦은 기념으로 보인다.
▲ 탄금대토성의 흔적 | ||
이는 해동필법의 김생이나 당시 유학의 최고봉인 강수의 학문적 기반이 충주지방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충주는 신라북진의 후방기지로서 남쪽의 군량미를 육로로 계립령을 통해 가흥창에 수집, 보급함으로써 한강유역 진출의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은 물론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도 경주의 진골문화에 대응하여 신라문화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는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현재 가금면 누암리고분군(樓巖里古墳群)은 이시기 유력했던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보인다. 1991년 충주공업전문학교(현재 충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동서 150m, 남북 100m 정도의 원추상(圓錐狀)의 평면 둘레 400m 정도의 토성이 존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 탄금대 안내판. | ||
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탄금대기가 있고 정상부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라는 2층 누각 형태의 정자와 그 아래로 임진왜란 때 팔도 순번사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순절한 열두대가 있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우륵선생 탄금대비,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가 비각 안에 서 있다. 비각에서 내려다 보면 계곡안에 대흥사가 있고 그 앞으로 위락지구가 있는데 이곳이 양진명소가 있던 자리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청도에는 계룡산, 죽령산, 양진명소에 소사를 정하고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는데, 견(犬)자를 잘못 읽어 대문산, 태문산으로 불리던 작은 산으로 이 곳은 그 밑에 남한강인 북창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내(달천강)가 합류하는 곳이다. 이 견문산에는 신라 때 악성 우륵이 와서 가야금을 탄주했다고 하여 그후 탄금대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 탄금대 동쪽으로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허리를 감싸고 돌며 흐른다. | ||
1. 우륵문화재 : 2. 감자꽃노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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