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론에 준열했던 정호와 장암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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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론에 준열했던 정호와 장암사당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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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2>

   
▲ 정호를 모시고 있는 장암사당.
충주에서 탄금대를 지나 중앙탑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륵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면 그 소리를 듣던 청금대라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2㎞쯤 더 내려가면 충주시 가금면 창동마을이 있다. 그곳 도로 옆 나즈막한 산자락 밑으로 장암 정호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하는 장암사당이 있다.

정호는 정철의 4대손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시문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충주의 누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숙종 28년(1702)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누암리 소재 누암서원은 본래 송시열·권상하·민정중·정호 등을 봉향해 왔는데 고종 1년(1864)에 훼철되었던 것을, 1952년 정호의 후손들에 의하여 누암서원의 건물부재중 일부를 가지고 와 정면 3칸·측면 2칸의 목조기와집으로 복원하고 매년 정호를 향사하고 있다. 현재 임금의 임명장인 교지 23장이 보관되어 있다.

   
▲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정호 영정
숙종 1년(1675) 스승인 송시열이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사화를 만나 귀양을 가게 되자 정호는 학문을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을 기울여 마음을 다스렸다.

숙종 4년(1678)에 어머니 상을 당해서도 부친상처럼 시묘살이를 하고 복을 벗은 후에도 자신의 정성이 흡족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임금이 수레를 보내 자신을 부름에도 사양하였다.

거듭되는 권유로 숙종 8년(1682)에 성균관에 들어가고, 숙종 10년(1684)에 문과에 급제하니 명성이 대단하였다.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를 폐하자 송시열은 임금의 친국(親鞫)을 받기 위해 귀양지에서 한양으로 오던 중 사사되고, 정호는 경성으로 좌천되었다.

숙종 20년(1694)에 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들어와 지평이 되었다. 그리고는 영서·영동 지방의 관찰사가 되어 깊은 산중 험한 곳까지 살피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함경감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어서는 최석정의 죄를 논하다 이태우의 탄핵을 받아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으로 일관했으며, 각지에서 그를 찾아와 강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귀양살이가 끝나고 누암강으로 돌아오니 그곳이 지금은 훼철된 누암리 누암서원이었다. 영조 1년(1725)에 대배(의정; 영의정·우의정·좌의정을 통틀어 부르는 말)의 소식을 듣고 관직에 복귀하여, 임인년(경종 2년)사화 때의 4대신 및 억울하게 죽은 여러 신하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 장암사당 아래편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8호와 76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창동 오층석탑과 마애불이 있다

영조 5년(1729)에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영조 12년(1736) 89세의 나이가 되어 돌아갔다. 정호는 강직했고 근엄했으며 의론함에 있어서는 매우 준엄했다. 평생 좋은 옷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살고 있던 집은 비바람을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각소(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함)를 자신이 했으며 사람을 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이웃에서 재상이 있음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집으로 『장암집(丈巖集)』 25권과 함께, 권상하와 도의적인 교분을 가지고 일찍이 스승인 송시열이 편찬하던 『문의통고(文義通攷)』를 완성하여 전한다.

1. 의론에 준열했던 정호와 장암사당 :
정호(鄭澔)는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정철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으로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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