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섬, 암태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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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섬, 암태도를 찾아서
  • 충청리뷰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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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작가회의 충북지회 주최
‘제7회 섬으로 떠나는 여름문학교실’ 기행기

잃어버린 文香을 찾아
떠나는 길은 늘 아름답다. 떠나는 길이 아름다운 까닭은 떠나는 이의 마음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늘 반추하게 되는 과거의 일들이 다소 과장된 아름다움으로 윤색되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는 까닭이다. 떠나는 길은 우리의 인생을 닮아있다. 누가 인생이라는 저 거친 험로를 지나가지 않는 이 있으랴.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고 때론 가슴 벅찬 희열로 놓여진 앞길을 가늠하기도 하지만, 때론 지친 어깨로 지난(至難)했던 삶의 깊이를 돌이키기도 하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여정(旅程)은, 그러나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시원(始源)의 고향을 마련하고 있기에 마음속에 이는 잔잔한 물결과, 때론 격정적인 급류를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행 또한 삶의 모습을 닮아서, 떠나는 길은 알 수 없는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슴뛰게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난을 치며 느끼는 묵향(墨香)과 같게한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급류를 타고 역으로 오르는 행위와 같다. 그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꿈을 꾸는 것이 여행이다. 인생이라는 이정표없는 여정에서 회귀본능으로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의 꿈을 우리들이 꾸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진정한 여행이란 자유를 찾아 떠나는 행로요, 자유인으로 성숙하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런 까닭에 여행이란 철저하게 스스로의 몫으로만 남게 된다. 획일적으로 규격화된 틀 안에서의 여행은 이미 그 가치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충북지회에서 마련한, ‘저항의 섬 암태도를 찾아서’를 테마로 한 ‘제7회 섬으로 떠나는 여름문학교실’은 그러나 여행이라 불러도 전혀 과함이 없을만한 것이었다. 이번 기행은 내게 잃어버린 글의 향기를 다시금 맡을 수 있는 기회가 됐고, 게으르고 나태한 일상을 털고 새로운 마음을 추스리며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덧붙이면, 이번 기행에서 우리 일행은 혼자서 떠나는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경험했고 힘들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정을 배울 수 있었다.
8월 2일 오전 8시30분. 이번 문학기행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일행은 서른명 남짓, 그러나 사람이 적을수록 여행의 맛은 깊어지는 법. 전날 고속도로 체증을 보도하는 TV를 보면서 일정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했는데 기우로 끝났다. 고속도로 사정은 생각보다 좋아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첫 목적지인 고창 고인돌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인 고인돌(dolmen)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石棚)이라 부른다. 고인돌은 덮개돌 아래에 조그만 받침돌들이 놓여있는 남방식과 넓직한 판석으로 이루어진 탁자모양의 북방식 두가지로 크게 대별되는데, 이곳 고창 고인돌군에서는 특이하게 북방식과 남방식이 모두 발견된다. 게다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고창 고인돌군은 대규모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85개소에서 모두 2000여기가 발견됐다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고창을 뒤로하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 북항에서 일행은 여객선이 아닌 화물선을 타고, 아니 화물선에 실린 버스를 타고 암태도로 향했다. 약간의 경비를 절약하자는 취지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남들 가는대로 섬을 찾아가서야 되겠느냐는 다소의 객기에 힘입어.

저항의 섬 암태도
암태도까지의 뱃길은 마치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 같았다. 오밀조밀한 리아스식 해안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섬들 탓이었다. 일행을 태운 배가 암태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께. 암태도와 연결된 다리를 건너 숙소가 있는 자은도로 갔다. 도착할 때까지도 섬을 찾아왔다는 기분이 나지 않았는데, 전망좋은 숙소에서 굽어 보이는 해변이 오른쪽 왼쪽 모두 있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이 뭍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섬이라 것을 실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에 서 있는 것일까? 섬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떠오르는 단상(斷想) 하나.
사람은 모두 섬일게다. 심연의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섬일게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우리들에겐 그러나 또다른 의문 부호가 남는다. 심연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삶이라는 동질의 여로를 따라가고 있지만 건널 수 없는 저 바다 건너편에서 풀리지 않는 빗장처럼 견고한 섬으로 남아 있는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그날밤 소설가 송기숙씨는 해변에서 강의를 했다. 밀물때가 되어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모기떼의 극성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누구 하나 자세를 흐트리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송선생의 이야기는 진지했다. 젊은 시절 ‘국민교육헌장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당당한 기백만은 잃지 않았던 선생의 머리에도 반백의 서리가 내려있었다. 암태도를 ‘저항의 섬’이라 이름지을 수 있었던 데에는 송선생의 공이 컸다. 1979년 선생은 창작과 비평에 3회에 걸쳐 장편소설 ‘암태도’를 연재했다. 1920년 일제의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으로 지주의 수익이 줄어들자 지주측에서는 그에 대한 충당으로 소작료를 올리게 되는데, 7∼8할이라는 살인적인 소작료 징수로 소작인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23년 9월 서태석을 중심으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해 소작료 4할 인하를 요구하지만 문씨의 거부로 소작료 불납동맹과 면민 규탄대회 등을 연다. 지주와 소작인들간의 갈등은 물리적 충돌로 이어져 소작회 간부 13명이 검거되고 이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결국 문재철이 획책했던 8할에 가까운 소작료 징수는 수포로 돌아가고 4할의 소작료로 결정된다. 송선생은 암태도를 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암태도 소작쟁의의 내용을 묻는 얼굴 허연 도회지의 교수라는 작자가 그네들 눈에 곱게 비치지는 않았던 게지. 평생을 바다만 바라보며 험하게 살아온 그들과 나의 삶에는 큰 간극이 있었던 게야. 그래서 생각해낸 게 술이야. 술 몇병 사들고 그네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니까 그냥 풀려부러. 그래 꼼꼼한 취재를 통해 소설을 쓸수 있었던 게야.”
이튿날 일행은 송선생의 안내로 암태도 소작쟁의기념탑을 찾았다.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그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듯, 힘없고 보잘것 없는 농투산이들이 모여 민중의 위대한 결과를 보여주었던 암태도. 압살하듯 내리쬐는 땡볕에 산기슭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는 맑았다.
집앞에 늘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던 팽나무, 그러나 세월의 두께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그 팽나무로부터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내는 이재무 시인의 강의는 서글서글하게 생긴 시인의 외모만큼이나 걸쭉하고 명쾌했다. ‘소재주의’에 천착하지 말고 늘 새로움을 찾아 떠나라는 시인의 조언은 가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내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우리 민족사의 큰 비극. 하면서도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이야기, 4·3항쟁. 두번째 강사로 나선 오승국시인(4·3연구소 사무처장)의 제주도 사랑은 지극했다. 그가 갖는 애향의 마음은 4·3항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데올르기에 의해 죄없이 희생당한 수많은 제주도의 양민들. 그 민중에 대한 연민의 정이 그로하여금 4·3항쟁에 ‘목숨을 걸게’ 만든듯 싶다. 1953년 제주도청에서 발행한 ‘제주도세일람’에는 사망자 수를 2만7719명으로 적고 있다고 시인은 밝혔다. 그러나 그때 민중이 겪어야 했을 좌절은 오늘 새로운 힘으로 우리들에게 살아 남게 되었다.

아, 민주화의 열정이여
마지막날 암태도를 뒤로하고 뭍으로 나온 우리들이 찾은 곳은 광주항쟁으로 희생된 영령들이 모셔져 있는 망월동 묘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날 망월동 국립묘지를 처음 찾았다. 망월동 묘지를 찾고싶은 마음만큼 그곳은 오히려 찾기를 유보하게 되는 이중성의 공간이었던 것이었다. 그만큼 내게는 망월동 묘지가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김남주 시인의 묘소를 찾았다. 94년 췌장암으로 숨진 시인은 민주화를 위해 싸운 투사였다. 하여 선동적이고 직설적인 그의 시에 대해 미학적 측면을 시의 주된 가치로 보는 이들은 높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종환 시인의 말을 빌면 그의 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뜰수 있을것 같다.
“생명의 본질, 우리 삶의 본질에 접근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단순한 모양을 띠게 된다. 이미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겉을 어떻게 꾸며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진실을 바르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단순해 지는 것인데, 김남주의 시도 그런 단순성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돌아오는 고속도로는 차가 밀리고 있었다. 심각한 체증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쉽게 올 수 있었던 것은 버스전용차로 덕분이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해 만든 버스전용차로처럼 우리들의 삶이란 것도 승용차가 아닌 버스의 길을 내어주는 그런 이타적인 것이 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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