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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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나
  • 충청리뷰
  • 승인 2019.09.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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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는 생산지와 소비지 곧장 연결, 속도 중요
속도는 소비 욕망 키우고 폐기물 배출 가속화
신 동 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신 동 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9월 주제는 대중교통이다. 대중교통은 수단적 측면이 크다. 교통수단은 도로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도로’ 이전에는 ‘길’이 있었다. 길은 의지이다. 관계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자 결과다. 길은 걷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걸으면 그것이 길이 된다.’는 말은 기득권과 고정관념에 맞서는 주체적이고 변혁적인 관점이 들어 있다.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태초에는 길이 없었지만, 한 사람이 가고 또 가면서 생겼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길은 어느 순간부터 주어진 것으로 되어 체제 내화된다. 그에 맞춰 고정관념도 생기면서 사회 구조는 변동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 고정된 길이 삶을 억압하고 기존의 틀을 강요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일어난다.

반면 도로는 길과 다르다. 권력과 자본의 표상이자, 저들 의지의 표현이다. 도로는 자본과 상품을 실어 나르는 혈관이다. 그래서 속도가 중요하다. 빨리 빨리 피가 돌아야 건강하다고 판단하듯이, 도로는 생산지와 소비지를 곧장 연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도로는 그래서 속도를 추구한다. 생산된 잉여가치 실현을 위해 생산지에서 곧장 소비지인 도시로 내달린다.

그러니 발전과 성장을 추구하는 순간 효율과 속도가 내면화되고, 그렇게 도로는 우리 의식에서 길을 배제하고 의식을 장악했다. 그래서 논밭을 메꾸고 산자락을 잘라내서 도로를 확장하고, 대대로 살아왔던 마을이든 삶의 터전을 뒷받침하는 산허리든 상관하지 않고 속도를 위해선 관통해버리고, 강은 다리를 놓아 직선으로 간다.

속도가 준 이익은 무엇인가
도로는 역사적으로 침략과 수탈을 위해 제국주의에 의해 건설되었다. 천 년의 로마 제국이 만든 도로가 그렇고, 일제가 놓은 경부선 철도와 신작로가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자본이 저들을 대신하여 과거의 도로보다 더 좋아진 고속도로, 고속철도, 항로, 해로(보통 하늘길, 바닷길이라 하지만 앞에서 언급된 맥락에서 보면 길이 될 수 없다) 등을 누비면서 더 빠른 속도로 이윤을 모아 욕망의 마천루를 올리고 있다.

이에 반해 역사적 길이었던 실크로드는 ‘사람과 문명’이 교류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자본축적의 수단인 ‘도로’를 이용해 전국을 일일생활권, 아니 반일생활권으로 누리고 있다. 도로가 만들어 놓은 편의를 우리도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길이 아니기에 편의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인해 생긴 시간이 삶에 여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더욱 바빠졌다. 예상과 달리 빠른 속도가 가져다 준 여유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대신 소비의 욕망을 키우고 폐기물배출을 더욱 가속화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속도가 빨라지면 우리는 반일 만에 일을 처리하고 남은 시간을 삶과 관계의 풍요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일일생활권’은 도로를 세금으로 건설하면서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고, 우리의 믿음은 순진했다. 고속도로는 서울-부산 간의 이동 시간만을 단축시킨 것이 아니었다. 사회 조직과 속도가 거기에 맞춰지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속도와 자본의 회전 속도가 그만큼 빨라졌고, 속도가 절약해준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고 자본이 구매한 시간이어서 노동 강도가 속도상승에 비례해 커졌고, 신경소모도 커져 더 피곤해졌다.

물론 자본과 국가가 이렇게 펼쳐놓은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편익을 누리기도 하지만, 이 편익도 결국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 대신 여유가 있었고, 돈도 얼마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져 시간이 짧아질수록 차비는 훨씬 더 많이 올랐다. 결국 시간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고, 그렇게 생긴 여유시간은 사실 비싼 차비를 지불하기 위해 과거에 이미 지출한 시간을 돌려받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 사람의 의지가 만든 길과 달리 도로-도로를 사회간접자본이라 부르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개념이나 명칭에 계급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는 속도를 추구한다. 우리는 그 속도에 빠져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야가 좁아지면서 맹목에 빠지기 쉽다. 결국 삶을 회복하고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제는 속도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후기

지난 8월 21일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라는 주제의 풀꿈 환경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노명우 아주대 교수. 그는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을 알면 뭐가 좋은가? 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사회학자이자 니은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노 교수는 세상을 현실 그대로 보는 것은 불편하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환상에도 속지 않으면서 객관적,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기초로 ‘무엇이 불편하게 하는가?’에 다가가는 연구자다. 그는 우리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지적 능력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터린’은 돈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소득과 행복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여 주목받는 학자이다. 소득 2만 불 이후엔 돈과 행복과의 상관 관계가 실종된다. 소득 이외의 다른 변수들 즉,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 인정, 지혜가 높아지고 사회보장제도가 좋아져야 행복지수가 상승한다. 왜 한국사회는 1인당 GDP 3만4,000불 시대에 행복지수는 세계 최하위권에 속하는가? 돈 이외에 당장 눈앞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다운 가치는 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놀이들이다. 이것이 인류문화유산이며 학문적 과제들을 낳았다. 직업 세계에서 보람을 찾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직업 세계는 직업이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과의 많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노명우 교수가 니은서점을 운영하는 건 직업 활동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놀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놀이하는 삶’이 중요하다. ‘인생은 단 한 번’ 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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