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행기] ① 민족 얼 서린 우수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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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행기] ① 민족 얼 서린 우수리스크
  • 권영석 기자
  • 승인 2019.09.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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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지방 항일독립운동 본산, 최재형,이상설 등 활동
고려인 5만명, 격동의 세월 거쳐 지금은 한국문화 전도사

러시아는 예부터 우리나라와 전략적 관계를 유지했다. 군국주의 일본의 침탈에 고통 받은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으며, 독도영유권 분쟁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쿠릴열도 영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시끄러운 이웃나라를 두고 러시아와 우리의 관계는 더 긴밀해질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 사이의 가장 합리적인 관계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러시아 연해주 지방을 찾아갔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

 

우수리스크는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80km,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 한인들이 처음 이주를 시작한 것은 1863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다. 조선과 러시아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우수리스크로 왔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894년부터 한인의 이주는 본격화됐다. 특히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전후에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었다. 일본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다짐한 한인들은 악착같이 이 지역에 적응해갔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며 개척리, 한인촌 등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갔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부르며 민족의 정체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냈다. 이들이 뿌리를 내린 곳에 항일 독립운동의 씨앗도 싹텄다.

 

우수리스크 최재형 생가에 위치한 최재형 동상
우수리스크 최재형 생가에 위치한 최재형 동상

 

페치카최재형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따뜻한 벽난로다. 최재형 선생은 일본으로부터 총살당하기 전까지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해 페치카 최재형이라고 불렸다. 인근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고려인 5세 정 마리아 씨는 현재 그의 손녀 등이 우수리스크에 거주하고 있지만 삶은 곤궁하다. 최재형 선생은 지금으로 치면 100억이 넘는 부자였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 산다는데 그는 그런 마음 하나 없이 모두 조국을 위해 썼다고 말했다.

노비 출신인 최재형 선생은 9살에 부모를 따라 주변 노비들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했다. 해안가인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농부, 어부 등 다양한 삶을 살았지만 특히 무기밀매로 큰 돈을 벌었다. 평소 부정한 돈을 벌었지만 좋은 일에 쓰겠다는 얘기를 해왔다.

최재형 선생은 1908년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한다. 안중근 의사가 소속됐던 비밀 결사체 <동의단지회>를 만들어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그는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에 안중근 의사 가족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계몽운동을 위해 1910년 재정난으로 폐간된 <대동공보>를 재발행 했고,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했다. 또한 교포자녀를 위한 한인학교도 설립했고 1911년에는 <권업회>를 창설했다. <권업회>의 목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이었다. 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세우고 인근 단체들을 통합해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만주에 흩어져 활동하던 이상설, 이동휘 등이 참여했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의 실질적인 버팀목이었다. 이를 고깝게 본 일본이 1920,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빨치산이 일본군을 학살한 니항사건을 빌미로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최재형 선생을 체포하여 총살했다.

 

우수리강변의 이상설 기념비
우수리강변의 이상설 기념비

 

곳 곳에 남은 흔적들

 

최재형 선생이 뿌린 씨앗을 바탕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192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러시아 민족주의가 대두됐다. 1937년 소련은 고려인 약 172000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군사적으로 대치 중이던 일본인과 용모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다. 1993년 러시아의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이 수립되기 전까지 고려인들은 모진 세월을 겪었다. 그럼에도 고려인들은 꿋꿋하게 뿌리를 내렸고 현재 약 5만명의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살고 있다.

이 중 경제적으로 성공한 고려인 3~4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인이주 140년을 기념하여 2009년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문화센터를 지었다. 그 속에는 고려인들의 이주역사와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다.

곳곳에 항일 기념시설들도 설치됐다. 이중에는 충북 진천 출신의 이상설 선생의 기념비도 있다. 그는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자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다.

일본의 방해로 만국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귀국하지 않고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1917년 사망하면서 일본이 지배하는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 화장해서 우수리강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인근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안타까운 점은 기념비가 선 땅이 현재 개인 소유라는 것이다. 고려인 가이드 정 씨는 가끔 기념비의 의미를 모르는 청년들이 앞에서 술파티를 벌인다. 관리주체가 없어 러시아인이나 관광객들이 꽃을 사다 놓는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람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국가에서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추모의식이 강한 나라다. 도시마다 영원의 불꽃’, ‘용사의 기념비가 있다.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들을 위한 기념비도 있다. 이들은 아직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가 러시아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흔적에 더 관심을 갖고 러시아인들에게도 알리는 일을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상설 기념비 인근에 남긴 메시지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상설 기념비 인근에 남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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