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언어천재 신미 대사가 기거했던 속리산 복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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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언어천재 신미 대사가 기거했던 속리산 복천암
  • 육성준 기자
  • 승인 2019.09.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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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세조길을 따라 그 흔적을 따라가다.

 

영화 [나랏말싸미]와 소설 [직지,아모르마네트]에서 공통으로 등장한 인물은 세종대왕(1397~1450)과 신미대사(1403~1480)다. 이들 창작에서 신미는 그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또 세계 최초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년)의 한글 표현이 그것이다.

세종(송강호 분), 신미대사(박해일 분), 소헌왕후(故 전미선 분) 주연의 영화는 모든 것을 걸고 한글을 만든 세종과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사극이다. 국어학계의 정설과 달리 신미가 한글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을 선택한 영화로 논란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 신미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를 베풀게 하였는데 높은 예절로써 기우하였다’ 고 쓰여 있다. 세종 이후 문종(장남), 세조(차남), 성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이 격하게 아낀 신미 스님의 기록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영화는 그의 한글 창제설에 대해 개연성 있는 재해석을 했다.

소설은 라틴어를 전공하는 전형우 교수가 아주 끔찍한 살인을 당하면서, 기자인 기연이 살해의 단서를 쫓아가는 추리형식이다. 여기에 단서로 세계최초 금속활자인 직지가 나오는데 직지의 유럽 전파설을 가정하여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스치게 된 여러 치명적인 사실을 시대를 거슬러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특히 소설 ‘직지’에서는 1441년 세종이 신미에게 한글을 만들어 달라는 소임을 맡겼고 그 글이 금속활자인 직지로 표현되어 속리산 복천암에서 한글을 만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미길 따라간 속리산 복천암

그럼 이 범상치 않은 인물 신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는 의구심에 그가 젊어서 20여 년 동안 기거했고 이후 다시 돌아와 입적했다는 속리산 복천암을 따라가 보았다.

속리산의 세조길이다. 아버지 세종이 그토록 아끼고 모셨던 신미를 만나기 위해 차남인 세조가 왕이 되어 즐겨 찾았던 길이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시작한 길은 복천암까지 2.62km로 이루어진 코스다.

처음에는 훈민정음을 어떻게 백성에게 널리 보급할까 하여 신미와 논의하기 위해 수시로 찾아갔고 말년에는 피부병 치료와 요양 목적으로 들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도 명나라와 유교 학자들 몰래 눈치를 보며 한글을 만들기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눈병과 피부병으로 몸이 상했고 세조도 그 유전으로 피부병이 생겨 꾀나 고생한 흔적이 세조길 곳곳에 보인다.

세조길은 4년 전까지만 해도 원래 콘크리트길이었다. 탐방객들이 온몸을 숲에 맡겨 걷고 있노라면 수시로 오가는 스님들의 대형 SUV 차량이 내뿜는 디젤 매연을 맡으며 길가 좌우로 피하는 꼴이었다.

적잖은 문화재 관람료(4,000)를 내고도 왜 숲내음보다 매연을 마셔야 하는가!” 하는 다수의 항의에 보은군은 지난 201616억 원을 들여 기존 탐방로 좌우 계곡과 호수 사이로 새롭게 세조 길을 정비했다.

 

아마 세조도 이 길을 조선 7대 왕의 위엄을 내뿜으며 사람 사륜구동인 가마를 타고 올랐을 것이다. 왕의 행차에 가마꾼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이 이 행렬에 얼마나 고된 나날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카메라의 무게감을 가마꾼의 무게감과 동일시하며 잠시 걷는다.

아름드리 활엽수와 침엽수가 터널을 이룬 오리 숲을 지나 법주사 입구 오른쪽으로 세조 길이란 선간판이 길을 안내한다. 푹신한 야자 매트를 따라 거대한 산자락이 반영된 호숫가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 폭의 수채화가 장관을 이뤘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른 세조는 세속 떠날 를 쓰는 속리산 풍경에 속세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마도 세속의 권력도 이 압도적인 대 자연의 파노라마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 웅장한 장관을 뒤로 하고 계곡을 따라 오른다. 나무 갑판으로 정비된 길은 청아한 물소리에 청량감을 더한다. 쉼 없이 걷다, 사진 찍다, 목이 타서 맑디 맑은 계곡물 한 모금 마시러 내려갔더니 표시판에 세조가 목욕했다는 목욕서가 나왔다. 이곳에서 목욕하고 피부병이 나았다고 하니 나도 무좀이나 치료할까 발을 담갔다.

세심정을 지나 탈골 암으로 가는 복천암 길목에 이 뮛고 다리이름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이윽고 복천암이 다가왔다. 단청 빛깔이 매우 곱고 균형미가 살아 있어 보였다.

풍수에 따르면 복천암은 속리산의 배꼽에 있다고 한다. 신미는 충북 영동에서 나고 자라 성균관에 입학했다.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퇴학하여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20세부터 20년 동안 속리산 복천암에 기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천암을 중심으로 신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복천암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부도가 남아 있다. 1975년 충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에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됐다. 옆에는 신미 대사의 제자인 학조대사의 부도(보물 1418)도 세워졌다.

복천암 월성 큰스님은 신미 대사의 부도는 이 지역에 없는 돌로 지어진 탑이다. 성종 때 만들어졌는데 탑을 짓기 위해 국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신미 대사는 국가에서 예를 갖출 정도로 당대의 고승이었다고 말했다.

신미는 이곳에서 세종에게 금속활자 주물주조법에 능통한 은수(소설 직지의 주인공)를 소개해 주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았다. 큰 바위는 쉿물을 녹이는 가마로 보였고 큰 스님 방은 은수와 그의 아버지가 묵었던 허름한 집터로 보였다. 그리고 신미는 이들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을 만드는데 매진했을 거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전통 주물기법으로 복원한 직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3만 여 개의 금속활자, 책 속에 활자가 박히듯한 78장의 활자판 등, 1377년 우리 선조에 의해 한 자 한 자 만들었을 그 위대함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청주는 어떤 도시인가? 미세먼지 1, 공원녹지율 최하위 등 최근에는 노잼도시’(재미없는도시)까지 등극에 올랐다. 도시는 정체성을 먹고 산다. 문자혁명, 지식혁명을 주도한 직지가 있음에도 방향성을 잃고 흘러가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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