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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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님을 생각하며
  • 충청리뷰
  • 승인 2019.09.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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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가르침을 준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정재홍 수필가
정재홍 수필가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물처럼 흐르라. 장일순 선생님은 1994년 5월 원주의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올해 2019년은 25주기를 모시는 해입니다. 그런데 혹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아십니까?

호암, 일초, 이암, 한도인, 일충, 모월산인의 여러 개의 호가 있지만 잠깐 쓰다 말았고, 주로 청강靑江 무위당無爲堂 일속자一粟子를 즐겨 쓰셨으니 그중에도 ‘무위당’으로 그 호를 아는 이가 제법 있겠다 싶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한살림’이라는 이름의 도농직거래조직을 이용하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1983년도에 창립된 그곳이 장일순 선생님이 처음 하신 일이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해 나가십니다.

한살림운동이란 농촌을 살리는 일입니다. “수입되는 농산품은 약처리를 안해가지고는 견뎌내질 못하니까, 바로 그 약 처리를 한 것은 벌레도 못 먹는다 이 말이야, 안 먹는다 이 말씀이야. 벌레도 안 먹는 걸 사람이 먹으니 그게 병이 날 수밖에 없잖아요.” ‘땅이 살아야지 사람이 산다’는 말씀이 한살림운동의 뿌리인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해월 최시형을 우리 민족의 거룩한 스승으로 모십니다. 그분이 계셨기에 손병희 선생이 있고 삼일만세운동도 됐고, 아시아로 보면 식민지 상황에 있던 중국이며 인도에도 크나큰 각성운동을 전했으니 최시형 선생을 으뜸으로 생각한다는 말씀이지요. 시인 김지하는 어려서 고교시절부터 스승으로 연을 맺고 선생님과 평생을 함께 하셨으니 시인의 ‘생명사상’도 무릇 기인된 바를 추측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앓는 것을 벼슬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앓는 것을 벼슬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렇게 잘 모시고 가지요.” 19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고 난 뒤의 선생님의 생각을, 책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끝자리에 ‘반체제에서 생명운동으로’라는 주제로 대담자 황필호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반체제’, 교회의 역할은 사회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가 되자면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 그래서 1971년 10월에 사회정의를 위해 저항을 하셨던 시기를 이르신 말씀입니다. 정치가 어떻게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 살리는 길로 가지 않고 잘 될 수 있겠는지를 준열하게 시대에 묻던 분이었습니다.

밑으로 기어라.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 중에 으뜸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시인 김지하는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그토록 외쳐왔던 민중민족론의 핵심이 한 마디로 ‘밑으로 기어라!’가 아닐까?”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지식층, 기득권들이야말로 민중과 민족 아래 바짝 엎드려서 밑으로 밑으로 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외침이나 주장 자체가 전혀 실현될 수 없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바로 그 이치가 아니겠는가!”하며 스스로 답합니다. 선생님의 암묵적인 가르침의 시작을 우리는 ‘밑으로 기어라’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바닥을 기어서 천 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는 표현은, 납작 엎드려서 겨울을 나는 보리나 밀처럼 한 세월 자신의 허물을 닦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봄날이 온다고 믿는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운동들이 곧 장일순 선생님의 고향 ‘원주’가 지난 시절 그 엄혹한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고향이요 메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후에는 확산된 조직적 민중운동의 첫 둥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류불경(水流不競),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께서는 야합이 판치는 정치판을 벗어나 사회운동가의 길을 들어서게 됩니다.

아내 이인숙 여사께서는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고 말하던 사람이 감옥에 갔다 오고는 변했다. 물결을 따라 흐를 줄 알게 됐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그냥 봉사하다 간다고 생각하라.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밑으로 기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가 ‘화두’로 삼아 지켜나가야 할 마땅한 말씀입니다.

덧붙이는 글, 장일순 선생님의 서화書畫를 빼놓을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뛰어난 기교란 어리숙해 보이는 법’이라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은 장일순 글씨의 본질이며 특성입니다. 말씀을 따라 읽는 일도 이 계절의 책 읽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 선생님의 난 그림과 글씨를 만나보는 일 또한 이 가을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싶어 강원도 원주 찾기를 살며시 권해봅니다. 눈으로 보고 머릿속 새기며, 그 울림을 가슴속 담아두는 일이 함께 조화로울 것입니다.

정재홍, 수필가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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