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가소스를 다시 만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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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가소스를 다시 만나는 기쁨
  • 충청리뷰
  • 승인 2019.10.0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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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명훈의 『수저를 떨어뜨려 봐』
김은숙 시인
김은숙 시인

 

오르페우스, 프로메테우스, 아프로디테, 에로스와 프쉬케 등 그리스 신화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 가운데서도 천마(天馬) 패가소스에게 남다른 관심이 가는 것은 왜일까? 하늘을 나는 말 패가소스. 신화에서 불가능한 게 없겠지만 말에게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는 것으로 인간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상상력이 내재해 있으며, 이는 다양한 창조의 원천이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웹툰이며 온라인 게임은 물론, 소설과 영화 등에도 신화적 메타포가 넘쳐나고, 일상에서 판타지를 상품화한지 오래인 현대사회를 상상력의 시대라고도 한다. 하지만 시장성을 겨냥한 상업적 상상력을 패가소스의 날개와 동등한 반열에 놓게 되지 않는다. 제품화된 상상력이 넘치는 시대에 우리 안의 영감(靈感)은 오히려 고갈되고 박제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요즈음, 소설가 이명훈의 단상집『수저를 떨어뜨려 봐』는 잃어버린 패가소스를 다시 만나는 듯 색다른 기쁨을 주었다.

『꼭두의 사랑』으로 2003년 <문학사상〉장편소설문학상을 수상한 청주 출신의 이명훈 작가가 2018년 출간한『수저를 떨어뜨려 봐』는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과 머무는 시선에 따라 시간과 경험을 넘나들며 사유가 이어지고 확장되는 풍요로운 사색이 담긴 단상집이다.

무겁지 않게 가벼운 걸음으로 그의 상상력의 나래에 동승하여 잊었던 어린 시절로 건너가기도 하고, 저마다 사물이 갖고 있는 내력과 서로 다른 기억의 층위를 들여다보기도 하며 때로 고요해지고 때로 가슴 뭉클해지는 사이, 잃어버린 패가소스의 날개를 다시 발견한 느낌, 제품화된 상상력이 아닌 우리 내면의 자유로운 근원적 상상력을 만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의식주, 골목, 이렇게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흘려버리는 사물과 풍경에 머무는 작가의 시선이 어떻게 사유의 밭을 거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가를 확인하는 재미의 밀도가 큰 작품이다. 사소한 대상으로 시작하지만 메시지는 그리 간단치 않아서 때로는 작가가 긴 메시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독자에게 주변 사물을 둘러보게 하며 더 깊은 사유를 권하기도 한다.

색다른 사색과 성찰이 있는 글
1부 <하늘과 땅>은 볼펜을 분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버스 그림, 정전된 상황, 종이컵, 자전거, 딱지, 고향집 마루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등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사소하고 소박한 것들이지만 깊은 사유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물들이 작가의 상상력과 성찰의 힘으로 새로운 무게를 만들어낸다.

2부 <의식주>는 수저를 떨어뜨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술자리에서 수저를 떨어뜨려보는 엉뚱한 행위와 숟가락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는 청아하고 맑은 소리에 은하수 별들이 반짝이고 천상의 소리가 가득한 우주가 새로 태어나는 듯한 순간을 그려낸다.

『수저를 떨어뜨려 봐』는 동일한 공간에 있는 사람 간의 대상과 집중의 차이,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영감의 농도의 차이로 받아들여지며 특별히 내 안의 공명이 큰 글이었다. 오늘날의 가스레인지와 보일러의 역할을 함께한 아궁이에 대한 따뜻한 단상, 요즘 젊은이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솥단지의 검댕을 검은 보석이라 새기고, 항아리에서는 가둠의 미학을 발견한다.

수저를 떨어뜨려 봐 이명훈 지음 들녘 펴냄
수저를 떨어뜨려 봐 이명훈 지음 들녘 펴냄

 

나뭇가지를 통해 천연도구의 시대를 생각하고, 정전의 시간으로는 자신과 만나는 경건한 시간을 그리며 마감하는 2부는 주로 시대와 경험을 관통하여 집 안의 것들을 다뤘다. 3부는 골목이 펼쳐진다. 담을 넘어 집밖으로,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 파란 비닐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등교한 형제가 전하는 훈훈한 온기와 마중물이 사라지고 없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아날로그적인 그의 감성이 듬뿍 담긴 이야기가 따뜻하다.

인문학의 시대라고들 한다. 거대 담론도 좋지만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 융·복합적이고 메타적인 통찰이 절실하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있다. 나는 볼펜에서 시작해 사물과 풍경, 내가 살아온 시대와 경험을 관통하면서 색다른 여행을 했다. 여행이 보다 깊어지도록 길동무가 되어준 지인들께 감사드린다. 즐겁고 의미 깊은 향연이었다. 책을 읽는 이들도 모비우스적인 사유를 매개로 저마다의 여행을 떠나보기를 바라본다.

-『수저를 떨어뜨려 봐』‘들어가며’에서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로부터 색다른 사색과 성찰을 모색한 글

 

쓴이의 여행길처럼 우리 주변의 것들을 다시 둘러보며 의미의 씨앗을 발견하는 가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우리의 발걸음이 담장을 넘어 골목, 골목을 벗어나 드넓은 들판으로 이어지며 저마다 풍요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이 우리 안의 영감, 빛나는 패가소스의 날개를 새롭게 만나는 가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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