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 재 ·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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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재 · 규
  • 한덕현
  • 승인 2019.10.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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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첫 해라서 그런지 지난 10월 한 달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 시간이었다. 곳 곳에서 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 등 각종 행사가 잇따랐고 언론들도 당시를 재조명하는 특집 기사와 프로그램을 여럿 내보냈다.

그중 단연 압권은 1979년 10월 16일 촉발된 부마항쟁이 서곡을 울렸다는 10.26 사태를 다룬 MBC 스페셜 ‘부마항쟁 40주년 특집 1979’ 이다.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시해당하는 과정이 실시간 생중계되듯 공중파를 통해 방송된 것은 아마 처음인 듯 싶다. 문제의 술자리와 당시 급박했던 총격 장면들이 실제 사진과 비교되며 재연되는 바람에 마치 40년 전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부마항쟁이 여러 시각으로 활발하게 재조명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사후평가가 꺼려지는 대상이 한 명 있었다. 김재규다. 방송은 물론이고 학술대회나 세미나 등에서도 김재규에 대한 언급은 하나같이 조심스러웠다.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을 놓고 아직도 그 사건의 성격규정에 선을 긋지 못하는 것이다. ‘김재규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올해에도 그저 ‘화두’로서만 던져지고 말았다.

김재규에 대한 그동안의 논란은 크게 두가지로 집약된다. 그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 내지 혁명을 일으킨 민주화의 의사(義士)인지 아니면 단순히 차지철과의 충성경쟁에서 밀린 상실감으로 우발적 사건을 저지른 대통령 살해범인지가 아직 정리되지 않고 사람마다 의견을 달리한다. 그의 재판 과정을 놓고도 이 두가지 추론만 난무할 뿐 명쾌한 답이 제시되지 않는다. 40년 만에 언론들이 작심하고 제작했다는 다큐물에서도 이에 대한 접근은 양비론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사건의 관련자들한테 의견을 물어 공개하는 게 전부였다. 김재규 평가는 이처럼 조심스럽고 버거운 문제다.

실제로 그가 국가내란죄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사형되는 전 과정을 살펴보면 일반인이 판단하기에도 헷갈린다. 치밀한 계획하에 짜여진 혁명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단순 도발적 사건이라고 치부하기도 쉽지 않다. 여기에 또 하나 혼선을 안긴 것은 체포된 이후의 김재규 말들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수사와 재판과정만을 보면 처음엔 체념한 듯 하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강하게 주장했다.

김재규를 변호한 안동일 변호사조차도 “처음엔 정치공작을 자행한 유신독재의 주구이자 주군을 살해한 패륜아로 봤지만 공판 과정에서 줄곧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역시 그를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는 얼마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민주화 촉진 공로로 재평가되고 명예도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10.26을 가장 실감나게 재현했다는 이번 MBC특집을 보더라도 김재규의 처신이 어설펐음이 드러났다. 바로 눈 앞의 잘 구분된 폐쇄공간에서 이루어진 저격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과정이 일사분란하지 않았고 총격 이후 또한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잡았다. 그를 따랐던 부하들도 그 때의 상황이 사전에 모의되고 계획된 혁명이라고 보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즉각적인 행동에 주저함을 보였다. 이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도 이미 거론된 내용들이다. 적어도 상대를 죽여야 하는 무력의 혁명이었다면 특정인을 죽이냐 마느냐를 현장에서 고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추론해보자. 김재규는 자신을 업신여기며 박정희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던 차지철과 유신체제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반감이 컸다. 그러면서 언젠간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내심 고민을 해 오던 중 그날 궁정동 술자리에서 급기야 결기가 폭발했다. 물론 이전에도 여차하면 자기가 혁명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 자기 부하들과는 차지철을 일방적으로 편애하는 박정희를 놓고 속마음을 털어놨을 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대통령 시해와 실제 혁명까지는 사전모의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주군에 맞서는 것에 마지막까지 주저했을 것이다. 분명 본인으로부터 무슨 사달이 있을 거라고 예단하면서도 사전에 치밀하게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은 것은 본인의 성격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죽은자는 말이 없다. 김재규는 최후 진술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외쳤다. 그리고 가족에게는 “만약 내가 복권이 되면 ‘의사 김재규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달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공원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한자로 ‘의사 김재규장군 추모비’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의사(義士)와 장군(將軍)이라는 글자는 현재 훼손된 상태다.

김재규에 대한 인물규정과는 상관없이 그가 저지른(?) 일은 우리역사에서 숨기지 못할 몇가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그는 박정희를 제거함으로써 끝이 보이지 않던 탈법적 유신통치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둘째, 아울러 박정희의 18년 군사독재를 한 방에 종식시켰다. 셋째, 이로 인해 12.12와 5.18의 도화선이 되면서 우리나라 민주화여정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똑떨어지는 혁명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는 검찰개혁을 떠올린다. 검찰개혁은 어느덧 혁명이 되고 있다. 나는 윤석열이, 신념을 가장한 역사의 기생충이 되지나 않을까 덜컥 겁이 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은 한 가족에 대해 무려 70여회나 압수수색을 하고 그를 신임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같잖게 함으로써 되레 원칙이 무색한, 사람 대신 조직에 충성하는 아집으로 변질됐다. 이를 부인하고 싶다면 조국이 장관직을 내려놓을 때 그도 물러났어야 맞다. 바로 이 것이 진정 책임있는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자진(自盡)이다.

역사의 발전은 기생충이 아니라 그 기생충을 척결하는 사람의 몫이다. 김재규 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과 윤석열을 환상의 콤비라고 했다. 이 말을 진심으로 했다면 ‘인간 문재인’은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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