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장흥순 구명운동을 바라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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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장흥순 구명운동을 바라보는 시각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5.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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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편집국장
황우석 파문이 전국을 짓누르는 사이 충북에선 이준용씨와 장흥순씨의 구속 소식이 많은 사람들을 심난하게 했다. 사실 이들의 구속은 의아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꼭 충북출신이라서가 아니라 한창 잘 나가던 기업인들이 졸지에 영어의 몸이 된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현재 경제계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주목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과연 얼마만한 명분을 얻느냐는 것이다. 현재 두 사람에게 씌워진 혐의는 기업활동에서 가장 지탄받는 뇌물공여와 분식회계다.

사안으로 볼 때 무슨 동정이니 인정이니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때문에 처음 구명운동을 입에 올린 인사들이 가장 염려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는데 다행히(?) 크게 반감이 없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죄는 밉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 자체가 마냥 매도되지는 않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들은 그동안 사업을 벌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 지역에 기여해 왔고 결국 이런 전후관계가 도민들로부터의 돌멩이 세례를 피할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명운동의 명분은 순수하게 선처를 앙망한다는 차원으로 보면 편하다.

기업을 평가할 때 꼭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도로 잣대를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도 일종의 흑백논리다. 기업의 순기능과 역할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사회환원은 기업활동의 궁극적 가치다. 아울러 나, 혹은 지역과 연고가 있다 해서 무조건적인 동정론을 펴는 것 역시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

무원칙한 온정주의는 사회를 건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굴절시킬 뿐이다. PD수첩 보도로 황우석교수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그에 대한 동정론이 전국을 휩쓸게 되자 일각에서 ‘황우석 민족주의’를 우려한 이유는 분명하다. 논란 그 자체보다는 감정이나 순간적 정서에 근거하는 여론확산의 또 다른 부작용을 우려한 것이다

. 이준용 장흥순에 대한 구명운동은 과거 그들의 행적이나, 어쨌든 지역기여를 감안한 발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적어도 하청업체의 피를 빨아, 지금의 큰 기업을 이룬 후 지역어른으로 행세하며 천민자본주의의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누구(?)보다는 백번 낫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지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피해의식, 이른바 잘되는 사람 못 봐주고 돈벌면 떠나야 한다는 자학적 지역논리가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쯤엔 이들 두 사람의 구속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결과는 사회 각계의 구명운동이라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결국 이런 속설은 분명한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바람이 있다면 이번 구명운동을 계기로 충북이 기업이나 경제활동과 관련해 더 이상 자기비하적 발상에 얽혀 왜곡되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못 된 말을 마치 무슨 깨우침이나 되듯 떠들고 다니는 지역 인사들도 스스로 많이 자각했으면 한다. 오히려 우리 지역이 기업하기 좋고 돈벌기 좋은 곳으로 새롭게 인식됐으면 하는 것이다.

신체의 구속은 당사자한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이준용 장흥순,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지금 안(?)에서 하게 될 생각이 향후 더 많은 지역환원의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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