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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직시하고 공론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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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직시하고 공론화 하자”
  • 충청리뷰
  • 승인 2019.11.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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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동전 양면 아니라 일면 죽음준비 교육 기피하지 말아야
최 승 호 충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최승호 충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개인의 주관적·심리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죽어보지 않은 이상,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와 죽음의 실체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이 글에선 죽음 자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죽음의 의미,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죽음의 불안 또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측정해서 살펴보곤 한다. ‘죽음불안’이라는 말은 혐오, 강한 미움, 불편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죽음불안’이란 개인이 죽음을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뜻하지만 죽음 그 자체뿐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에서 오는 두려움과 사후 결과에 대한 불안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확대할 수 있다.

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죽어
죽음에 대한 불안을 측정하는 여러 연구를 토대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 최소한 네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첫째, 자신의 죽음 또는 통제능력 상실의 불확실성에 관한 두려움이다. 둘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며 셋째, 죽어가는 과정(dying process) 자체에 대한 두려움, 넷째, 매장 및 육신의 부패나 해체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타당한 감정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도 이러한 죽음 불안 정도가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실험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죽음을 인생 주기의 일부로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겐 죽음은 단지 시간이 다 소모되어 버렸다는 일련의 오랜 좌절들 속에서 최종적인 ‘좌절’로 받아들여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을 재조명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며 점차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죽음이 다가온다고 지각하는 것은 여생을 더 가치있고 유용하게 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확실한 건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죽음의 필연성)이며,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죽느냐(죽음의 예측불가능성)이므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죽음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삶의 유한성을 늘 자각하고 매 순간 가치 있는 삶을 살며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카르페 디움(Carpe diem)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현재를 즐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사람이 평소에는 못 느끼다가 아플 때 아내나 가족이 그리워지고 소중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긴 여행을 떠나 있을 때 가정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은 것이나 임사체험을 한 사람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사고를 당했을 때 일상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느끼듯이 죽음을 늘 자각하고 살면 그만큼 매 순간순간 삶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죽음을 추방하고 망각, 회피하며 사는 것이 삶을 병들게 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며 그리하여 이전 사회보다 많은 사회병리현상을 낳고 있다. 삶의 일부분으로 죽음에 대한 망각, 상실된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현대인에겐 치유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가족과 친족이 보는 가운데 가정에서 사망하였고 그 후 장례를 이웃이 공동으로 모시고 마을 청년들이 상여를 매고 장지로 떠나는 것이 문화였기 때문에 죽음, 죽음의 처리 또한 공동체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아픈 사람은 병원에서 의료기술과 기계에 의지하여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고 그 다음 대개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받고 장사시설로 떠난다. 죽음은 어느덧 일상에서 사람 간의 관계적인 의미를 중시하기보다는 법적 의료적 행정적 판단기준과 처리에 맡겨졌다.

언젠가 모두 죽는다
과거에는 조부모나 가족 구성원 죽음의 순간을 어린애들도 가정에서 함께 지켜볼 수 있어서 죽음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일상생활공간과 격리된 의료 시설에서 죽음을 맞는 병원사(病院死)가 일반화되었다. 죽음의 외연화, 타자화 된 죽음, 길들여진 죽음이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죽음을 쉽게 망각하게 되었고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회피하고 두려워하거나 금기시하게 되었다.

죽음을 ‘인간 최후의 성장단계’로 규정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의 말이나, ‘다 이루었다’고 한 예수의 말(요한복음 19장 30절)이나 어쩌면 다 같은 의미다.

독배를 마시기 전날 제자가 스승에게 도망가자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가 ‘내가 왜 도망가느냐? 나의 실체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는데 오히려 나는 기대되고 설렌다’라고 한 말은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단절된 벽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며 자아완성의 최종단계, 삶의 완성의 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과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일면이어서 직시하고 공론화하면 개인의 삶과 사회도 보다 밝고 건강해 질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성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였고 은폐되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성은 사회에서 상업화 되었고 후천성면역결핍성(에이즈) 같은 전염성 질환을 은폐했을 시 대량 참사의 영향도 있어서 공론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성교육은 일반화되었지만 죽음은 아직도 기피하고 회피하는 소재로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이 성교육과 죽음(준비)교육은 동일시되어야 하고 같은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다가오는 죽음을 망각하지 않고 직시하게 되면 나머지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어려운 변화들에 적극적이며 생산적으로 대처하려는 삶의 양식을 갖게 된다. 죽음을 올바르게 지각하는 것이 삶을 더 풍부하게 한다. 그리고 미국의 한 심리학자의 실험에서, 시의 공동체 묘지 안에서, 그리고 묘지를 벗어난 장소에서 동일하게 노트북을 떨어뜨렸는데 묘지 안에 있던 사람들의 행동에서 배려심이 40%나 더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죽음을 자주 대하면 인간의 심성에도 배려와 협동심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내로남불의 극단적 이기심이 판을 치고, 돈과 권력을 쫓아 좌고우면하는 사회에서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자각을 한다면 좀 더 타인에게 배려하며 오늘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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