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버려야 할 것을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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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 버려야 할 것을 버리자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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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 석(서원대 법학과 교수)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흥분과 혼란, 급기야 공황상태로까지 내몰았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진실공방이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진실규명이나 검증은 관련기관이나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우리 같은 문외한들은 조용히 결과를 지켜보면 될 것이다. 다만 우리를 정작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사건의 본질이 황우석이라는 개인에 국한된 문제이기 보다는 우리사회 심층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비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황우석 교수 사건은 대한민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일회성 사건으로 끝내 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본질적 문제를 논의하는 계기로 삼아보는 것이 ‘희망’을 운운하는 형식적인 새해의 덕담보다는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황우석 사건에 비친 우리는 어떤 모습이며,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버려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소위 ‘조폭문화’를 들 수 있다. 조직폭력배는 보스를 중심으로 조직의 율법을 어긴 자에게는 가차없는 응징이 가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양심이나 인권 그리고 숭고한 가치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황우석 교수팀 역시 이러한 조폭의 생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연구원들은 난자제공을 강요받아도 불평없이 응해야 하고, 보스가 모든 연구비를 착복해도 연구원들은 모르는 척 복종해야 하며, 논문이 사기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조직과 보스를 배반할 수 없는 구조-즉 전형적인 조폭적 지배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이것이 황우석 교수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을 들여다 볼 때, 황우석 교수팀 이상의 조폭문화가 강건함을 알 수 있다. 조직의 장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부려도 부하직원들은 한마디의 항변조차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간혹 내부고발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곧바로 조직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로 매도되어 엄청난 시련과 불이익을 입고 철저히 파괴되어 갔다. 이러한 조폭문화가 지배하고 용인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민주화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투명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둘째, 과정을 무시한 결과지상주의가 문제이다. 황우석 교수의 문제는 실용화 할 수 있는 결과물을 빨리 만들어내야 한다는 조급성이 만들어낸 결과지상주의 실패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과정과 절차는 무시한 채,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식의 왜곡된 발상은 이미 우리의 뼈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성장을 위해 생존권은 박탈될 수밖에 없다. 생산성증대를 위해 여성과 장애인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수량와 성과물만 있을 뿐 정작 중요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셋째, 패거리주의에 녹아 있는 분열의 광기이다. 황 교수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MBC와 PD수첩에 가해진 광란의 이지매는 우리사회의 극단적 패거리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사회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투쟁과 상처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패거리 주의는 배타성을 띠게 되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과 비판을 가로 막아 결과적으로 국가적·사회적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갈등양상들이 대화와 이성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마주달리는 기차의 형상으로만 진행되는 근본적 이유가 바로 패거리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박한 자본의 노예근성이다. 황교수에 대한 진실게임 초기에 우리는 황교수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국익을 저해하는 매국노”로 매도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토록 외치던 국익의 실체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할 것 같다.

다름 아닌 바로 ‘돈’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황 교수를 국민적 영웅으로 숭상한 이유가 그의 위대한 업적 때문이거나, 불치병환자들의 구원이라는 대의가 아니라 실용화하면 연간 400조원의 수입에 대한 환호성이었으며 배금주의의 발로였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것을 진정한 국익 때문이라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황우석 사태는 발가벗은 우리의 모습에 그대로 닿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이 청산되지 않은 한 과거의 갈등양상들은 올해도, 내년에도 그리고 그 후년에도 모양만 바뀌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새해인사는 형식적인 덕담보다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무거운 화두를 서로에게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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