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마지막 성찰, 여자라는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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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마지막 성찰, 여자라는 성(性
  • 한덕현
  • 승인 2019.12.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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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충북여성정책포럼이 올해 충북여성계 10대뉴스 1위로 ‘성범죄’를 꼽았다. 34세 여성이 총리가 됐고 그가 꾸린 내각의 장관 19명중 12명이 여성이라는 핀란드 소식이 전해진 게 엊그제인데 아직도 여성을 상대로한 남성의 성범죄가 사회적 최대 이슈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압박하는 미국에 대해 “한국은 미국의 패권을 위해 돈 대주고 몸 대주는 속국이 아니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가 말하려는 취지에는 백번 공감하지만 그 표현은 부적절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과거 오랜 역사동안 외세의 침탈 때마다 이 나라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잔상들이 돌연 엄습했음을 숨기지 않겠다. 여성 비하 정도가 아니라 민족적 상처를 건드린 꼴이 됐다.

회교나 이슬람국가들에서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무지막지한 성범죄는, 그 것이 안기는 좌절감이 얼마나 큰지 ‘인간의 문명’이라는 걸 참 덧없다를 넘어 저주스럽게까지 한다. 그러한 야만이 21세기 대명천지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쉽게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지난 2년간 미투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도 그 쓰나미를 피하지 못했건만 사회는 여전히 남 녀 사이의 성(性)을 극복하지 못하고 충북에서조차 성범죄가 여성계의 올해 최대 뉴스로 등장했다.

30년전 도올 김용옥의 책 ‘여자란 무엇인가’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내용이 그릇되고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언어 사용이 파격적이었다. 남 녀 성기를 그대로 표현했고 남 녀 사이의 묘사가 곳곳에서 원색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특히 여성들한테도 비난보다는 호평을 받았다. 책을 통해 성에 대한 동서양의 세계관을 비교분석하며 서양적 기준에 맞춰진 여성성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자를 하늘, 여자를 땅으로 여기는 동양사상이 결국엔 남녀의 인격적 동등함을 강변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기독교적 영향으로 여자를 고작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부속품같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여성을 문화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대접했다고 주장했다. 김용옥은 남녀 성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실체까지를 차별화하려는 문명의 일탈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우리나라에 젠더(gender)라는 사회적 구성으로서의 성(性)개념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의 얘기이고 보면 그는 말그대로 시대를 앞서가는 석학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비교되는 인물이 문재인 정부 초기에 논란을 일으킨 탁현민이다. 그가 쓴 ‘남자마음설명서’는 솔직히 남자의 입장에선 공감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끝내는 부담스럽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남성의 우월적 시각에서 성을 표현하려 했고 또 이러한 프레임에서 여성이란 상대를 객관화했다. 그 결과로 남녀의 성을 동등함보다는 상대적 기호(嗜好)와 선택적 호감으로 따지려고 했으니 여성들이 곱게 봐줄 리 없고 끝내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가 나혜석으로 하여금 젊은 시절 당시 잘 나가던 변호사와 결혼하고서도 가정을 뛰쳐나와 저항의 삶을 살게 한 원인은 그 때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남성 위주의 인습과 도덕관이다. 그는 나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외치다가 말년엔 거리를 전전하다가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매달린 것은 남 녀간 ‘삶의공존’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인간임을 부르짖었지만 세상은 그를 외면했다. 수원시가 중심상권에 문화와 만남의 공존 즉 ‘삶의공존’이라는 콘셉트로 나혜석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지만 지금 인근 상인들과 노점상들이 공존이 아닌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도 참 아이러니컬 하다.

 

사실 요즘 여성운동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젠더’와 ‘젠더 감수성’은 이미 1949년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 2의 성’이라는 책을 통해 주창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했다. 똑같이 성(性)을 표현하지만 섹스(sex)와 젠더(gender)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그는 이 때 설파했다. 여성운동의 시발은 ‘여성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여성도 같은 인간, 같은 인격체이기 때문에’라고 역설한 것이다. 사회적 구성으로서의 여성, 인격과 역할로서의 성인지를 자각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보봐르 역시 여성운동의 해법을 남성 비판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구조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도 결국엔 남 녀라는 성의 대립구조로 해석하려 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나보다 완전하고 나와 닮은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하며 3가지 조건 즉 -①결혼하지 않고, ②자식도 낳지 않으며, ③서로에게 완벽한 자유허용-을 전제로 사르트르와 2년 계약결혼을 하고서도 동거 이후 줄곧 사르트르의 바람기에 시달렸던 마음고생의 발로라고 사족을 달기도 한다. 어쨌든 여성운동의 가장 지향점, 남자와의 상대성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로서의 절대성을 깨우치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제 2의 성’은 지금까지도 세계 여성운동의 최고 백과사전, 전범으로 통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은 여전히 반 이성, 형이학적인 부분이 많다. 물리적 혹은 정서적으로 왜곡된 남성성(masculinity)을 내세운 여성인식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꼭 야만(野蠻)이 아니더라도 사회통념을 가장한 여성에 대한 가학(加虐)의 유혹은 언제든지 남자들의 머리에 꽈리를 틀고 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충북여성계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툭하면 불거지는 각종 성범죄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여자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조직을 관리하고 또 이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살아온 경험칙으로 본다면 답은 딱 하나, 아주 단순한 이 한 가지밖에 없는 듯하다. 남자와 똑같은 인격적 실체의 존재라는 것, 부부관계에서도 그렇고 자식과 부모 간에도 그렇고 직장의 상하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것이 상호 신뢰로 쌓인다면 설령 욱!하고 욕을 한다 해도 상대에게 마냥 악의로만 들리지는 않을테고 또 여성에 대한 가벼운 성표현 정도는 때론 성희롱이 아닌 해학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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