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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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만 하면 돼
  • 충청리뷰
  • 승인 2020.01.0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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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도시 발견하고 건강증진에 큰 도움
청주시 ‘걸으면 돈 줍니다’ 실천하면 좋을 듯

 

걷기는 공평하다. 신체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비용도 들지 않고, 굳이 장소도 상관없다. 이토록 민주적인 것이 또 있을까. 혼자 걸어도 좋고, 같이 걸어도 좋다. 건강에 좋고, 여가수단이 되기도 한다. 시인 랭보는 걸어서 유럽을 방랑하며 불멸의 시를 남겼다. 그의 고향 샤를빌에는 ‘걷는 랭보’ 동상이 있다고 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발터 벤야민의 파리 산책을 통한 사유의 결과물이고,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경성 산책의 경험을 공유한다. 걷기는 작가에게 관찰의, 작곡가에게 리듬의. 철학자에게 사색의 통로가 된다. 걷기의 개인적 차원의 효용이다.

걷기는 도시를 가장 잘 발견해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을 지역적 차원이라 하자. 우리는 걸으면서 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보도의 관리 상태를 살피고, 지붕과 외벽과 담장의 건축 양식을 비교한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안내자가 되고, 시장통에서 계절 과일이나 찹쌀 도넛을 산다. 즉 걷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가로는 안전해지고, 동네 상권이 활성화된다.

그 뿐이랴. 개인의 건강 증진은 국가와 지방정부의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킨다. 자동차 대신 걷기를 선택한다면 당장 교통사망자수와 자동차 배기가스가 줄어든다. 지역적 효과는 지구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걷기는 기후변화에 대항하고 지구를 살리는 사회적 실천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분업화된 업무는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경쟁은 관계로부터 소외시킨다. 장소 간 이동을 위한 걷기는 노동의 일부일 뿐이다. 노동과 관계의 먹이사슬에서 살아남고자 오늘도 우리는 술자리로 향한다. 어쩌다 술자리가 없는 날엔 소파에 누워 TV를 켠다. 허리둘레는 늘어 가는데 다리는 얇아지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일을 마치고 나면 쌓인 집안일에, 아이들은 학원에, 숙제에, 유튜브에 도무지 걸을 시간이 없다.

법적으로는 2012년 8월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이하 보행안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보행권’이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보행안전법 제3조제1항은 ‘보행할 권리’를 그리고 제2항은 ‘모든 국민이 장애, 성별, 나이, 종교,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지역적 사정 등에 따라 보행과 관련된 차별을 받지 아니하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필요한 조치를 마련해야 하는 의무조항을 명시했다. 오염된 지구, 복잡한 현대도시에서 보행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청주시 녹색시민수당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하정우가 쓴 <걷는 사람>의 일부다.

그의 공상처럼 하루에 만 보 이상 걷는 사람에게 주당 만원씩 준다고 하자.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를 놓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건설 노동자, 택배원, 청소부와 같이 장시간 걸을 수밖에 없는 계층에겐 일상의 보너스 같은 복지가 될 수 있다. 엄마들도 자녀들에게 “공부 좀 해” 대신 “나가서 좀 놀아”라고 말하게 될지 모른다.

 

이미 걷기앱 ‘워크온’과 연계한 지자체의 다양한 걷기 마일리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SK텔레콤에서도 주 단위 걷기 목표를 달성하면 총 6개월간 통신비를 할인해 주거나 파리바게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등의 상품권을 제공하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청주시도 이를 도입해보면 어떨까? 보행이 개인과 도시와 지구를 살리는 실천적 행위이자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민주적 특성을 고려할 때 수당지급의 명분이 있다. 실현방안으로 우선 스마트 시티 사업과 연계가 가능하다. 걷기 앱은 이미 상용화되어 기술개발의 부담이 없다. 청주형 걷기앱과 스마트시티 기술 및 프로그램을 연계하여 ‘스마트하게 걷는 청주’ 조성을 목표로 하자. 거리에는 스마트 횡단보도, 스마트 가로등을 설치하고,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보행 게임을 개발하여 한여름 밤 보행 축제를 여는 건 어떨까?

보행관련 데이터는 쾌적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고, 보행시설을 확대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예산은 단기적으로 보건복지 예산의 활용이 가능하고, 장기적으로는 도로 건설 예산이 보행자 도로 확대와 녹색시민수당으로 전환되면 좋겠다. 녹색시민수당은 청주페이로 지급하자. 시민들의 건강과 공동체의 안녕과 지역 상권 활성화가 동시에 가능하다.

걷기에 따른 보상 금액과 보상 범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너무 적은 금액이 지급된다면 사람들은 걷기에 기꺼이 동참하지 않을 것이고, 너무 많은 금액이 지급된다면 시 예산에 부담이 되고, 또한 편법적인 수단들을 동원시켜서라도 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
너무 이상적인가? 걷고 싶은 도시는 모든 도시가 꾸는 꿈이자 이상이다. 산책이 일상이 되는 도시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미 세상에는 더 발칙한 상상들이 즐비하다. 콜롬비아 보고타시는 2015년 1월 1일부터 평일 하루 6시간의 러시아워 동안 택시를 제외한 ‘모든 자동차의 통행을 제한한다’는 혁명적인 안이 주민투표를 통과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걷는 사람들의 힘이다.

제목은 강상구가 쓴 <걷기만 하면 돼>에서 빌려왔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과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정책적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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