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없는 발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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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없는 발전은 없다
  • 충청리뷰
  • 승인 2020.01.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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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한 상 청주대 법학과 교수
조한상 청주대 법학과 교수

 

2020년 예정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제21대 총선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지역 거리 곳곳에서도 한 표를 호소하며 손을 흔드는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국회의원은 이론상 지역의 대표가 아닌 전체 국민의 대표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 지역 국회의원으로 선출될 것인지 문제는 주민들의 삶에도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국회의원을 뽑아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보내면, 그들은 지역 현안을 챙기고 예산을 받아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중앙 무대와 언론에서 활약하는 것 그 자체가 주민들의 자부심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꽃이며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 선거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창시자 중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가 귀족정치에나 어울리는 제도라고 평가했다. 이 사실을 들으면 적잖이 놀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는 선출하는 유권자들과는 사회적으로 다른, 더 탁월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 쉽게 풀어서 말해보자.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 아니라, 학벌도 좋고 경력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런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자로 선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계속 이러한 사람들을 대표자로 뽑아 주는 속성을 보인다. 자연히 대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게 되어 마치 귀족들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상을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소 과장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차분하게 현실을 관찰하면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미국과 같은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 엘리트의 지위가 세습되고 지역구가 상속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정도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국회의원이 선거철에는 속이라도 내어 줄 것처럼 허리를 굽히다가 당선만 되면 얼굴색을 바꾸는 원인 중 하나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유권자를 대변하지 않는 국회의원은 결국 유권자에게 스트레스만 안겨 준다.

이러한 난점이 있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파격적 제안을 무작정 따를 수는 없다. 그는 추첨 그러니까 제비뽑기에 의해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민주주의에 어울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단 귀족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선거제도의 태생적 한계를 잘 인식하고, 이러한 한계가 현실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거제도를 가급적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것으로 잘 가꾸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국민을 가장 잘 대표할 사람을 뽑고, 만약 그에 부족함이 있으면 과감하게 교체해 버리는, 유권자의 적극성과 역동성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대 국회 300명 의원 중 초선이 131명(43.7%)인데 반해 충북은 단 1명(11.1%)이라고 한다. 재선은 전국이 23%이지만 충북은 44.4%이고 또 4선은 전국이 10.7%이지만 충북은 33.3%라고 한다. 충북 전체에서 청년과 여성 국회의원은 전무한 상태이다. 물론 기존의 지역구 의원들에 충분히 만족을 해서 나온 결과라면 수긍해야 하겠다. 그러나 실상 의정활동에 대한 만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한다.

충북 도민들의 변화에 대한 기대는 크지만 그 기대를 실제 선거결과로 이어지게는 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번 총선에는 변화를 ‘원칙’으로 삼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굳이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변화 없는 발전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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