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알고 보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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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알고 보면 쉽다
  • 충청리뷰
  • 승인 2020.01.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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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초 대한민국이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사실 입증
단시간내 많은 종류 책 간행 필요해 금속활자 고안했을 것

 

직지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 동안 학계를 비롯하여 정관계, 언론 등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시민들의 가슴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직지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너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쉽다.

12세기말 고려는 무신정권기를 맞아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최충헌에 의해 성립된 최씨무신정권은 그의 아들 최이(우)에 이르러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최이는 본래 무신출신이었지만, 문신인 이규보를 등용하고, 서방을 설치하여 정치적 자문을 구하는 등 새로운 문신들을 양성하고자 노력하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문신들을 양성하기 위해 책이 필요했고, 책을 만들기 위해 인쇄를 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책을 만드는 방법은 목판 인쇄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목판의 경우 한번 판을 만들어 놓으면 동일한 내용의 책은 계속해서 인쇄가 가능하지만, 다른 종류의 책을 만들고자 할 경우에는 목판을 일일이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이럴 경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만아니라, 경제적인 부담도 따르게 된다.

따라서 단시간 내에 많은 종류의 책을 간행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다종의 책을 간행하기 위해 한글자씩 움직이는 활자 인쇄술로 전환하게 되었다. 즉, 목판에서 활자로 바뀌면서 그 재료도 나무대신 금속을 도입하여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목판본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상정예문의 발문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는 진양공 최이가 1239년에 쓴 발문에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새긴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미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가 최이를 대신하여 작성한 상정예문의 발문에는 고금의 예문을 모아 상세히 정한 상정예문 50권을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보관토록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정예문의 간행 시기는 최이가 진양공이 된 1234년에서 이규보가 사망한 1241년 사이가 된다. 즉,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두 책은 기록만 전할 뿐 실물은 전하지 않고 있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1372년 9월에 성불산에서 제자 법린의 도움을 받아 부처와 인도, 중국의 조(선)사들이 마음의 본체 즉, 깨달음을 가리켜 보인 중요한 절목을 뽑아 상·하권으로 편찬한 선불교 최고의 교과서이다. 백운화상이 77세에 입적함에 따라 그의 제자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1377년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이 소장되어 있다.

직지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상정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로서, 대한민국이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발명국임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유네스코에서는 직지를 현존하는 금속활자 인쇄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인류의 인쇄 역사와 기술 변화를 알려주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증거물로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에 2001년 9월 4일 등재하였다. 이제 직지는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가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세계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청주시는 모든 금속활자 품어야

 

1985년에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의 옛 터가 확인됨에 따라 정부에서는 사적 제315호로 지정하였다. 흥덕사지를 정비하면서 1992년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당시 박물관의 명칭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 안으로 흥덕사지 박물관, 직지박물관, 인쇄박물관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청주고인쇄박물관이었다. 그 이유는 박물관이 청주에 있기 때문에 청주라는 지명을 넣고, 구텐베르크 인쇄술로 대변되는 근현대 인쇄와 구별되는 우리나라 전통의 인쇄술을 나타내기 위해 ‘고(古)’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금속활자 발상지는 개성으로 남북이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목판 인쇄술과 금속활자 인쇄술을 아우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쇄 전문박물관으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청주시에서는 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된 이후 직지를 세계화하고,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박물관 증축,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네스코 직지상 제정, 직지문화특구 지정, 금속활자 전수교육관 건립, 근현대 인쇄전시관 건립,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유치 등 많은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직지의 위상은 항상 흔들리고 있다. 직지보다 앞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인쇄물이 출현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지가 죽어야 직지가 산다는 말이 생겨났다. 따라서 청주는 직지로 시작했지만 금속활자 문화운동의 메카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향후 재도약을 위한 중·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세계는 지식재산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에서는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날을 대한민국 지식재산의 날로 정하였다. 고려시대 지식의 상징인 금속활자 인쇄술로 탄생한 직지가 오늘 대한민국의 지식재산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금속활자 발명의 대명사인 직지는 대한민국이 지식재산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정하 서원대 교양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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