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리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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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리 증후군
  • 한덕현
  • 승인 2020.02.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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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굳이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임미리의 ‘민주당만 빼고’ 칼럼이 최근 우리사회에 넘쳐나는 혐오주의의 단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두 가지는 어쨌든 어감에 있어 매우 자극적이다. ‘광화문 촛불이 결국엔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다’고 시사하는 부분과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부분이다. 특히 후자는 공직선거법의 위반소지가 큰지라 정치학자라는 그가 이를 모를리 없겠지만 고민 끝에 용기(?)를 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미리 파문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또 한번 좌절하는 것은 특정인들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국가와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작금의 문화적 천박성이다. 전광훈이라는 목사도 그렇고 태극기 세력도 그렇고 문빠들도 그렇다. 정치인들 또한 허접하기 그지없는말 한마디에 꼬리를 잡혀 본인은 물론이고 소속 정당, 심지어 여당 인물의 경우 정부까지 곤혹스럽게 한다.

요즘은 어지간한 쇳소리는 축에도 못 낀다. 더 자극적이고 더 적대적 언어를 사용해야 관심을 끌고 언론을 탄다. 이 과정에서 기승을 부리는 건 극도의 혐오를 부추기는 막말과 저주다. 과연 이들이,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원색적인 말들이 한 나라의 근간을 흔들만큼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이번에도 결론적으로는 임미리가 툭 던진 암기서린 한 마디에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국가적 거대 담론들이 대책없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이같은 국가적 가치에 돌을 던지고 또 이에 대한 책임까지를 수반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그 숱한 사람들이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거리에서 얻어터지고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쟁취한 지금의 민주국가 체제와, 언론의 자유를 폄훼할 만큼 과연 그가 그만한 자질과 자격을 갖췄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칼럼을 비판하는 자들로부터 신상털기가 시작되자 그는 스스로 커밍아웃을 하며 50대중반을 향하는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본인의 직업과 지난날 보수정당과의 인연도 밝혔다.

 

그의 직업인 ‘연구교수’를 검색했더니 이런 해석들이 달렸다. ‘대학교 교원의 하나, 전공 분야의 연구에 전념하는 교수’, ‘대학의 부설 연구소에서 연구분야에 종사하는 계약직 교수로서 직급에 관계없이 계약기간은 1년으로 계약연장과 승진은 연구업적에 따라 결정됨’ 등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런 주문을 하고 싶다. 좀 더 치열하게 살아 정당이나 기웃거리지 말고 정치학자로서 그 정당의 확실한 리더나 책임자가 되기를, 또한 연구교수를 넘어 정규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자신의 학문을 책임있게 전파할 수 있도록 앞으로는 더 치열하게 살 것을 말이다. 그런 다음에 이번 칼럼보다 더 정제되고 세련된 글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의 혐오주의 극성을 신영복의 성찰로써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사상범으로 몰려 20여년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그는 “감옥은 대학이다”라고 했다. 사회 구성의 두 축인 강자와 약자의 생존 논리를 감옥에서 실감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자는 위선(僞善)으로, 약자는 위악(僞惡)으로 자신을 지키려 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강자는 선한 척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지으려 하고 약자는 강한 척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재소자들의 문신을 예로 들었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잡범들은 온갖 문신으로 강함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이는 여린 벌레와 곤충들이 화려하고 원색적인 날개나 외피로 상대를 위압하려는 것과 같다고 한다. 시위현장에 붉은 머리띠와 새빨간 글씨가 등장하는 이치도 그렇다. 반대로 판검사가 검은 법의(法衣)로 엄숙과 정숙을 압도하듯 강자는 법과 도덕이라는 위선으로 자기를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행세하는 사람들이 뒤로는 온갖 부정과 편법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논리다. 우리 지역사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지금처럼 상대에 대한 막말과 저주가 넘쳐나는 건 어찌보면 약자가 자신을 가장하여 강자에게 드러내기 위한 위악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이 것으로 주목받으려 한다. 참 비열하고 졸렬하다. 사회적 규범과 가치, 그리고 존중돼야 할 권위조차 해칠 뿐더러 궁극적으론 사회통합을 유린하게 된다. 위악을 하는 사람들이 위선을 하는 사람들에게 악용될 땐 문제는 더 커진다. 사회적 혼란을 극도로 부추기기 때문이다. 작금의 형국이 그렇다.

세계사에 진실과 허위의 대결이라는 세기적인 역사를 남긴 드레퓌스 사건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 과정은 유대인이라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질시, 억압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일관됐다. 결국 용기라는 것도 이러한 발상에서 비롯돼야 호응을 받는다.
나는 민주당을 찍지말라는 임미리의 용기가 상대를 향한 혐오와 질시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자신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치기어린 무모함으로 느껴졌고 그 역시 코로나에 버금가는 최근의 대한민국 역병, 막말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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