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역시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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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역시 블랙코미디
  • 한덕현
  • 승인 2020.03.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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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찰리 채플린이 원조인 블랙코미디는 세태의 부조리와 모순을 삐딱한 시선으로 냉소하는 데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보통의 코미디가 그저 평면적인 쾌활한 웃음을 안긴다면 블랙코미디는 역설과 독설의 이미지로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정치와 코미디의 비교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최근 들어 그냥 코미디가 아닌 블랙코미디로 대체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만큼 정치가 더 황당하게 정도와 상식을 유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껏 양당제의 폐해를 불식시켜 정치의 다양성을 꾀하겠다고 선거법을 고치더니 지금은 오히려 거대 양당이 서로 의석수를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온갖 꼼수를 동원하고 있다. 정치개혁과 세대교체를 들먹이며 새롭게 정치에 입문, 공천을 받은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기성 정치인들보다도 더 진영논리에 매몰된 경우가 많다. 특히 전문직이나 언론 등에 종사하다가 총선전에 뛰어든 사람들 중 대다수는 좌우 이념의 ‘꼴통’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아주 편향된 가치관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정치개혁은커녕 물만 더 흐릴 게 뻔하다. 싹수가 노랗다는 것이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선거구에서 선택받지 못한 어떤 후보는 슬그머니 옆동네로 난입해 오랫동안 지역을 다져온 정치후배를 한 순간에 미아로 만들었다. 그에게 일말의 인간적 신의라도 있다면 최소한 경선이라는 절차는 택했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또다른 한 사람은 일찌감치 컷오프되고도 무소속 출마 운운하며 한참이나 나이어린 같은 당 후보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 누릴만큼 누린 처지여서 당으로부터 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다면 용퇴가 정답인 것이다. 염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정당정치의 위기 혹은 정치의 형해화(形骸化)에 대한 우려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어찌 보면 후자가 더 심각한 문제다. 정당정치의 위기는 정치분야의 난맥상을 의미하겠지만 정치의 형해화는 궁극적으로 국민 의식과 국가 가치관까지 훼손한다. 형해화의 사전적 의미는 ‘형식만 있고 가치나 의미가 없게 됨’ 혹은 ‘내용은 없이 뼈대만 있게 된다는 뜻’ 이다. 시쳇말로 겉포장만 그럴듯하지 그 속은 별볼일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 해당될테지만 정치분야에서 유독 심한 관계로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를 적시, 개혁의 요원함을 비판해 왔다.

개혁의 아이콘이던 조국의 뒤를 캐보니 일반 국민의 상식에 반하는 것들이 많았다. 조국에 대한 검찰의 반인권, 강압적 수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한 정치인의 형해 현상과 이로 인한 국민상실감, 가치관의 혼돈을 얘기하는 것이다. 조국을 응징한 윤석열 또한 마찬가지다. 원칙과 소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이미지는 최근 MBC의 추적 보도로 불거진 가족의 비위행위로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민주사회에서 형해화의 가장 최악은 이처럼 잘난 사람들의 이중성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각 당이 개혁과 변화를 외치지만 현실은 과거에서 한발짝도 못 나아가고 있다. 서로 입장만 바뀌었을 뿐이지 선거판을 지배하는 것은 유권자로 상징되는 국민과 그 삶의 존중이 아닌 오로지 앙시앵 레짐(구체제)에 대한 타도와 이에 대한 대응 뿐이다. 그러면서 적대와 혐오정치만 대책없이 부추긴 결과 철학적 정치이념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비루한 정치공학만 넘쳐난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형해화와, 이로 인한 3류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국민들은 끝간데없이 정치인들이 양산하는 좌우 진영논리의 만만한 먹이감이 되고 있다.

정치의 변화와 개혁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조국이 검찰개혁을 완수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윤석열이 자신을 신임한 대통령까지 욕보이며 검찰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난 날을 보면 개혁을 전제로한 특정인에 대한 기대는 예외없이 물거품이 되었다. 역대 대통령이 갖은 수사(修辭)의 슬로건을 내세워 국가개조를 외쳤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 전례가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들만의 리그인 기득권을 해체하려면 결국 관건은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정상적인 조직문화, 그 것도 철저하게 오랫동안 준비하고 공을 들여야 가능한 것이다.

대공황과 2차대전을 경험하면서 보수의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한 미국 공화당은 1960년대부터 대학과 연구소, 언론 등에 전략적으로 투자하며 보수의 담론과 논리를 키워내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90년초에 클린턴 시대를 만들고 이어서 오바마를 길러낸 민주당은 레이건 재선 직후인 1985년 민주지도자회의(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라는 것을 만들어 노선과 비전의 창출, 정립에 힘써 10여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치적 신념이나 논리보다는 막말과 증오, 적대적 언사가 더 언론을 장식하고 그 당사자는 단번에 유능한 정치인으로 대접받는다. 정당은 눈만 뜨면 상대를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반드시 죽여할 불구대천지 원수로 난도질 하는데 올인한다. 그러니 야야의 경계를 넘어 그래도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표창원과 이철희가 정치판에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불출마는 민주당의 손실이 아니라 국민의 손실이다.

50여년전, 유럽 정당정치의 붕괴를 예고한 한나 아렌트의 경고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 것도 똑 떨어지게 말이다. “정당체제의 붕괴는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는데 실패한 것에서 비롯되고,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로부터 무언의 지지와 동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정치에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정치의 전체주의화를 경계한 이 말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의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젊은이와 대중들의 탈정치화, 그리고 이 와중에도 적대감의 표출에는 물불을 안가린다면 과연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는 4월 15일, 아무리 코로나로 정신이 없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투표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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