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아래에서
상태바
꽃그늘 아래에서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4.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 진 청주 관음사 주지

   
내가 머물고 있는 앞뜰에는 지금 봄꽃 향기가 한창이다. 벚꽃 향기가 지나간 자리에 홍매화와 해당화가 붉게 피었고, 돌단풍 금낭화 등 야생화들이 수줍은 듯 꽃을 내밀고 있다. 그 은은한 꽃향기가 방문을 열 때마다 바람결에 흩날린다. 또한 삼성각(三聖閣) 뜰에는 불두화가 여린 잎을 무성하게 드러내고 있다.

꽃이 피면 그 모양이 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불두화(佛頭花). 이 꽃은 사월초파일을 즈음해서 만개하는데 올해에도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듯 때맞춰서 필 것 같다.

불기 2550년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오고 있다. 해마다 꽃향기 가득한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이 땅에 강림하신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네팔의 룸비니 동산에도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는데 그 향기가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다. 아주 오래 전에 그 꽃길을 따라 부처님은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위대한 선언을 하셨다.

‘모든 세상이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막 태어난 아기가 걸음을 걷고 사자후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 세상에 오실 때 분명한 목적과 원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인데, 이른바 원생(願生)이다. 그 원력은 다름 아닌 중생들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겠다는 대자비심이다.

이에 견준다면 우리 범부들의 모습은 업의 인연으로 태어나는 업생(業生)이다. 업생은 잘못된 과거의 습관에 이끌려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늘 고통이 존재하고 시비 질투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이면서,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미망 속을 헤매는 중생들이 얼마나 안쓰럽고 애달퍼 보였을까. 그러므로 중생을 사랑하는 연민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중생 곁에만 머물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이 사바세계에 오신 것이리라. 다시 말해 본래 갖추어져 있는 우리 내면의 ‘부처’를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원력화신(願力化身)으로 나투신 것이다.

부처님은 가장 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신 분이다. 세상에 나자마자 어머니의 죽음과 직면하게 되고, 젊은 시절에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곁을 떠나며, 노년에는 임종을 슬퍼하는 제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생의 모습을 통해 애착과 슬픔에서 자유로울 때 해탈과 열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알고 보면 우리 삶은 드라마 각본처럼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이 때로는 삶을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삶의 극적인 장치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을 반전시킬 때 삶의 본질과 더 가까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삶의 리얼리티’라고 말한다.

다시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아마도 삶의 리얼리티를 강조하실 것 같다. 누구나 고통스런 삶을 원치 않지만, 번민과 슬픔을 당당한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기쁨과 슬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인생이 부처의 삶을 실천하는 자의 참 모습이다.

또한 부처님은 중도(中道)의 삶을 말씀하실 것이다. 중도의 사고는 어느 쪽에도 손을 들지 않는 적당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적인 양극을 부정하고 가장 합리적인 자주적 행동 양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중도는 독선적인 주장보다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조용한 대화에 가깝다. 우리 사회에 가득 차 있는 대립과 갈등은 오직 중도의 가르침만이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실 것만 같다.

산창을 열고 꽃향기를 듣는다[聞香]. 햇살은 눈부시고 산새소리 청아하다. 마치 내 마음 속의 아집과 욕심을 놓으면 우리들 안에 구족되어 있는 ‘본래의 부처’가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무래도 이 좋은 계절에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는 것은 부처님 오신 뜻을 전하고 싶은 2600년 전 룸비니 동산의 그 꽃향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