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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산성의 종주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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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산성의 종주바위
  • 충청리뷰
  • 승인 2020.04.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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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의 이름을 승리의 땅에 박아놓았나

 

대림산은 충주시 남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시내에서 수안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 산은 계명산(775m), 금봉산(남산, 636m) 등과 함께 충주분지의 한 축을 형성하는 산이나, 그 높이가 489m 정도로 낮은 편이다. 시민들에게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옛 문헌에는 충주의 진산(鎭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대림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고, 포곡식 산성인 대림산성이 있다. 살미면 향산리 창동마을을 그 중심에 두고 삼태기처럼 감싸고 있는 둘레가 약 5km에 달하는 산성이다. 산성에서 가장 낮은 서문지(100m)와 가장 높은 봉수터(487m)의 해발고도 차이가 350m를 넘고 산 능선을 따라 성의 자취가 남아있어 등산로와 거의 정확하게 겹쳐진다.

대림산성으로 둘러싸인 창동마을 원경
대림산성으로 둘러싸인 창동마을 원경

 

충주부사 ‘우종주’에서 따온 종주바위
산성의 서문터에서 성벽의 자취를 따라 가파르게 오르다 보면 남문지 근방에서 인상적인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성안이 거의 내려다보이는 곳에 불쑥 솟아 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이 종주바위란다. 대림산을 전부 종주하여야 볼 수 있는 바위인줄 알았더니, ‘우종주’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우종주는 1차 여몽전쟁 때 충주에서 고려군을 지휘하다가 양반별초군과 함께 도망쳐 ‘충주 노군의 난’을 촉발시킨 충주부사의 이름이다.

비록 양반별초군은 도망하였지만 충주에서는 노군·잡류별초군이 끝까지 남아 몽고의 선발군을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몽골의 본진은 아니었지만. 피난 갔던 지휘관과 양반들이 들어와 적이 약탈해간 물건의 파괴와 망실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상을 주진 못할망정 노군을 문책하려 하였으므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노군의 난인데, 물건에 대한 책임 운운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전투 장소는 당연히 충주읍성이다. 반면 대림산성은 충주 읍성에서 10리는 떨어져 있다. 충주읍성의 전투에서 도망만 갔던 우종주가 왜 대림산성 안에 있는 큰 바위덩이의 이름이 되었을까 의문이다. 더욱이 대림산성은 우종주가 싸운 곳도 아닌데...

여몽전쟁에 있어 충주는 전 지역이 모두 전쟁터였다. 그러나 대림산성이 전장(戰場)이 된 것은 5차 여몽전쟁이 진행되던 1253년 10월의 충주산성전투 뿐이다. 적장 야굴이 이끄는 몽고의 본진에 맞서 충주산성 방호별감이었던 김윤후가 충주성민과 단합하여 70일간의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노비문서까지 불태우며 군·관·민을 하나로 묶어 몽고의 본진을 막아낸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충주는 1254년 국원경으로 승격되는 영예를 누렸고, 군인이나 노비들을 포함한 충주인은 모두 특진하거나 면천되는 특전을 누렸다.

김윤후장군의 충주산성 전투(중원역사인물기록화)
노계(다인철소)출토 철제생활용구
종주바위와 사모봉

 

물론 70일간 전투의 장소에 대한 논의는 대림산성이 가장 유력하나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전투지로 거론되는 곳은 세 군데인데, 남산성은 발굴결과 신라가 쌓은 성으로 70일간 입보하여 전투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고, 월악산성은 충주에서 너무 멀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대림산성은 물도 풍부하고 적을 막기 좋은 요새지이다. 달천강에 의해 조성된 천연의 해자가 있고, 유사시 노비문서를 비롯한 관문서를 쉽게 옮길 수 있는 위치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외세 침략에 강하게 항쟁한 중원
그런데 종주바위가 왜 승리의 땅 대림산성에 있을까? 보통 지명에 승리한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는 예는 많지만, 몽골 군병이 무서워 도망한 장수의 이름을 자랑스런 장소에 붙인 예는 처음이다. 역발상의 뛰어남인가 아니면 비겁자가 되지 말자는 또 다른 웅변인가?

어쨌든 몽골은 송나라를 점령하고 서유럽까지 정벌한 지금의 미국과 러시아를 합쳐놓은 듯한 세계 최강국이었다. 이 몽골을 상대로 거둔 승리이기에 너무도 자랑스러운 항전이다. 고려가 몽골을 상대하여 40년 동안 항전한 것도 대단하지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도시이름이 승격된 예는 더 높이 평가된다.

그 예는 비록 네 번에 지나지 않으나 참으로 자랑스럽다. 1차 여몽전쟁 때 박서장군 등의 활약으로 귀주에서 승전하여 귀주를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과 2차 때 승장 김윤후의 활약으로 적장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처인부곡을 처인현으로 승격시킨 예가 있다. 또 5차 때 70일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충주를 국원경으로 승격시킨 것과 철소민들이 몽골군을 물리쳐 이겨 다인철소가 익안현으로 승격된 사례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뒤의 두 번이 모두 충주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이 특별하다. 특히 다인철소민의 항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몽골군과 싸워 이겨 승격되었다고 했다. 이는 충주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산지 임을 감안한다면 우수한 철제무기가 바탕이 되어 거둔 승리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후일 원나라가 요구한 조공품 환도(環刀) 1천 자루를 고려에서는 이곳 충주에서 제작하여 보내고 있음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이렇듯 외세의 침략에 강하게 항쟁하던 호국의 기상을 간직한 이 땅에는 특별히 중원인의 강철 같은 의지가 돋보인다. 종주바위에서처럼 비겁한 자의 이름을 승리의 땅에 박아놓는 역설적인 일이 이곳에서 행하여 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이긴 자에 대한 칭송보다 더 확실하게 후세에 교훈을 새기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길경택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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