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도시 충주 다인철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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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도시 충주 다인철소 이야기
  • 충청리뷰
  • 승인 2020.05.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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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철소는 철 다루던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
세계 최강 몽골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 밝혀내야

 

중원지역은 삼국시대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삼국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이유는 한강수계를 확보할 수 있고, 남북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발달한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라 알려져 있다.

한강은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 칭해지는 만큼 이 물길을 확보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한다고 여길 정도로 중요시 되었다. 고대로부터 한강은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물류의 통로였고, 전 국민의 30%가 넘는 인원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일찌감치 개통된 하늘재, 죽령, 조령 등을 통해 사람이 오고가며 남북문화가 본격 교류되었고 삶이 풍성해졌다. 이러한 곳이기에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든 이곳을 차지하면 패주가 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제철 흔적 많은 충주시
그러나 삼국이 이곳에 눈독을 들인 더 큰 이유는 풍부한 철 산지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바로 고대국가의 힘의 원천이었던 철광석이 있고, 이를 제련, 가공할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이 있었기에 세 나라가 모두 중원지방을 노렸을 것이다. 그러면 그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탄금대에서 발굴된 철정(鐵鋌)
탄금대에서 발굴된 철정(鐵鋌)
충주시 칠금동 제철유적의 제련로
충주시 칠금동 제철유적의 제련로

 

삼국시대의 철 제련과 관련된 유적이 확인되는 곳은 충주와 청주, 진천 등이다. 충주의 탄금대나 칠금동 유적은 4세기대 백제의 제철유적인데, 한강수로를 따라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소비지로 하였기에 대량의 생산체제가 필수적이었던 것 같다. 반면 청주 송절동이나 진천 석장리의 제철유적은 청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소비자의 수요를 담당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시대 이후의 제철 흔적은 주로 충주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고려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충주지역의 철불, 특히 충주의 대원사, 단호사, 백운암 철불은 지역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타 지역과 구분되어 따로 ‘충주철불’로 일컬어진다.

만정, 금곡, 창동, 연수철산 등 충주 대소원면, 중앙탑면 일대에 산재한 철광산은 충주의 성격을 견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박물관, 충북문화재연구원 등을 비롯한 여러 관련기관에서 조사하여 대소원면과 그 주변에서 확인한 100여 곳의 제철유적과 45곳의 탄요유적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대소원면은 고려시대에 다인철소(多仁鐵所)가 있었던 곳이다.

다인철소는 철을 다루던 장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곳이라 해석되는데, 『고려사』 권56 고종42년 조에는 이곳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을 물리쳐 익안현으로 승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국가는 행정제도를 통하여 철이나 금, 은, 종이, 도자기와 같은 광물이나 각종 수공업 제품들의 생산과 수급을 관리하였다. 이때에 다인철소도 만들어졌을 것인데, 이 철소사람들이 몽고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고 그 결과 익안현으로 승격했다. 몽골과의 40년이 넘는 전투에서 도시이름이 승격된 사례가 기록된 것은 4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한 번이 바로 이곳 다인철소였다는 사실은 실로 대단한 일임이 분명하다.

승리의 땅 ‘익안현’은 날개 익(翼)자와 편안할 안(安)자를 쓴다. 익은 별자리 28수 가운데 물컵자리로 남쪽을 상징하여 주작의 날개 부분에 해당한다. 다인이라는 용어가 풍성하고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음가를 높인 것이다.

그러나 익안현이라는 이름은 발음이 불편하므로 자연스럽게 이안으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이안과 유등면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류면이라는 지명이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2012년 대소원면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결국 바로 이 대소원면의 이안지역이 고려시대의 다인철소라고 판단된다.

다인철소 사람들은 어디서 싸웠을까
그런데 우리의 의문은 이 다인철소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싸웠느냐 하는 것이다. 다인철소가 있었던 대소원면 이안 일대는 평야지대로 야트막한 구릉성 산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이렇다 할 성곽조차 없다. 다만 유학산 정상부에 야트막한 석성 흔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어 그 가능성을 살필 수 있으나 분명치 않고, 성마루에 있던 토성에서 싸웠을 것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주장일 뿐이다.

충주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512호)
충주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512호)
제련로 복원실험
제련로 복원실험

 

다만 ‘어떻게’ 라는 명제에는 충주의 우수한 철제무기가 바탕이 되어 거둔 승리였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주목되는 기록은 1227년 충렬왕 때 원나라의 조공요구로 환도(環刀) 1,000자루를 충주에서 주조케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의 환도가 어떤 모양인지 실물이 없기에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 얼마나 예리한 칼이었는지 모르나 몽골의 칼보다는 성능이 우수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할 뿐이다.

당시 몽고는 유럽대륙까지 점령한 강대국이었음에도 고려의 항복을 받은 후 익안현에서 환도를 만들어 갔다. 이는 다인철소사람들이 몽골과의 싸움에서 월등한 무기가 있었기에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라 유추하여 해석할 수 있다.

철의 산지로 고대와 중세, 우리 역사에 중심이 되었던 중원지역! 이곳 사람들은 철을 능숙하게 다루던 기술로 생활 속에서는 호미나 낫을 만들고, 전쟁 중에는 칼과 창, 방패를 만들었다. 또 이를 정신력으로 승화시켜 철불을 만들며, 강철 같은 민족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체계적인 발굴과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하여 세계 최강 몽골을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을 철저히 진행해야 할 것이다.

/ 길경택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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