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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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위하여∼∼∼
  • 한덕현
  • 승인 2020.06.0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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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식당에서 모임을 하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더니 갑자기 “긴급재난기금을 위하여!”라는 선창에 큰 소리로 합창한다. 신통(?)하게도 주변 손님들의 반응은 싫은 기색이 아니라 오히려 동조하는 분위기다. 누군가가 코로나 재난기금으로 한 턱 내며 호기를 부리는 듯 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필부필부들이 가장 많이 받는 인사는 ‘재난기금 받았느냐’와 ‘어디에 썼느냐’이다. 지인들 사이에서도 “가장인 자기 통장으로 입금됐지만 부인과 애들로부터 집단항의를 받고 어쩔 수없이 현금으로 각자 지분을 돌려줬다”는 푸념에서부터 “그동안 꼭 사고 싶었던 것을 이번에 비로소 손에 쥐었다”는 숙원 해결까지 여러 얘기들이 전해진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긴급재난기금이 국민들한테 ‘소득’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일깨우며 자영업자들의 매출회복이나 전반적인 내수진작에 많은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음식점 등 각종 매장에서 “재난기금 쓸 수 있어요”라는 안내문을 경쟁적으로 게시한 것을 봐도 그 효과는 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또 한번’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가 하면 충북같은 경우는 정부와 별도로 자체 재난기금을 지급한 다른 지자체와 비교돼 행정 책임자들이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이번 재난기금 지급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갑자기 ‘기본소득’ 개념이 국가적 담론으로 광범위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현실이 참으로 기가막힌 상황에서, 급기야 보수의 구세주로 나선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기본소득을 자당 혁신의 주요 과제로 띄우고 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몇 달 전 코로나 직전만 하더라도 보수당 대표가 이런 말을 입에 올렸다간 그야말로 목을 내놔야 할 판이었을 텐데 어느덧 우리나라 분위기가 이 정도로 바뀐 것이다.

박근혜 탄핵의 암운이 서서이 깃들기 시작한 지난 2016년 중순 쯤, 조기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당시 잠룡으로 꼽히던 박원순과 이재명이 각각 ‘한국형 기본소득제’와 성남시의 ‘청년배당’으로 이른바 낮은 단계의 기본소득 개념을 조심스럽게 꺼낼 때만 해도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세력들은 그들을 빨갱이와 사회주의자로 매도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세계를 규정짓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기본소득제도이다. 세계 주요국가들이 지금 이 제도에 근거한 국가지원금을 놓고 홍역을 앓고 있지만 기본소득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전지구적인 실험단계에 머물러 있다. 18세기부터 이 문제가 철학적 의제로까지 다뤄진 유럽에서조차 아직 명확한 제도적 안착을 못하고 현재도 핀란드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이 제도의 지속가능성이 시험중이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기 전 자신이 쓴 책에 “빈곤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기본소득 보장”이라고 주장해 한 때 급물살을 탔던 미국 또한 별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고서는 가장 많은 공적기금을 투입했다.

다만 막대한 석유자산을 활용해 1976년 ‘permanent fund dividend’라는 영구기금을 조성한 후 1982년부터 1000달러를 시작으로 매년 석유수익금 실적에 따라 2000~3000달러 내외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알래스카주는 현재를 기준, 세계 최고의 기본소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본소득으로 각종 취미를 즐기며 느긋하고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는 알래스카 주민들의 삶이 종종 우리나라 TV의 여행프로그램에도 소개돼 부러움을 산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거가 이 곳을 여행하며 알래스카 기본소득 제도를 “초당파적 아이디어”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세계적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2014년 발생한 세모녀 자살사건과 2016년 스위스의 국민투표가 기본소득에 대한 공론화를 부추긴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전자가 기본 생계비에 대한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함을 웅변했다면 후자는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횡행하던 진영논리의 볼모가 되어 기본소득의 이념 및 사상적 측면을 고민케 하는 특단의 계기가 된 것이다. 지난 21대 총선을 앞두고선 기본소득당이 공식으로 출범해 국민들에게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물론 헌법에 ‘연방정부는 조건없는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라는 조항을 넣기 위한 스위스의 국민투표는 23% 찬성/77% 반대로 부결됐지만 세계사회에 던진 파문은 컸다. 스위스 국민들이 끝내 반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재 각 나라가 공통으로 고민하는 것과 똑같다. 기본소득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며,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하면 노동의지를 감퇴시켜 이것이 곧 국가와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후자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논리와도 같다. 이런 논란에 필히 등장하는 또 한가지 견제는 기본소득제도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결국 포퓰리즘을 부추겨 나라를 망조로 이끌게 한다는 우려다.

한데 이번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의 뇌에 오랫동안 굳건하게 자리하던 이런 인식을 일거에 바꿔놓고 말았다. 바이러스 한방에 세계경제는 대책없이 무너지고 빈부격차와 계층갈등 또한 임계점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당장 살아남는 게 우선‘라는 위기감이 높아진 것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촉발된 미국의 대중폭동은 꼭 인종차별 만이 아닌 코로나로 야기된 총체적 사회불평등 구조에 따른 반작용이라는 진단은 이래서 나온다.

코로나 이후의 지구촌이 비대면의 산업구조 즉 자동화와 로봇,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4차혁명으로 보편화된다는 미래예측을 감안하더라도 앞으로는 전통적인 노동관이나 가치관 만으로는 국민, 민중의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자각이 절로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게다가 광화문 촛불로 확인했듯, 현대문명의 성서처럼 받아들여지던 자본·민주주의가 오히려 평등과 대중주권을 위축시키고 침식했다는 이른바 포스트 민주주의 사회에선 기존의 자본과 노동으로 대표되던 계급적 질서에 국한되지 않는 대중과 대중정치의 구성이 그 대안으로 떠오른다는 점에서도 기본소득제도는 더 이상,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국가경영의 곁가지 정책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 이젠 본령(本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광의적 의미로 해석하면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와 사형제 폐지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개인이 아닌 국가와 사회의 공동체적 일원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 보장받을 천부(天賦)의 인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여 나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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