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과 기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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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과 기부문화
  • 한덕현
  • 승인 2020.06.1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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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윤미향을 다시 거론하는 건 그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다. 어차피 윤미향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가려질 것이다. 꼭 검찰 수사가 아니더라도 공적영역의 논란은 언젠간 그 실체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연일 언론에 오르고 또 엊그제 평생동지라는 위안부 쉼터 소장의 갑작스런 죽음처럼, 일단 그가 나라를 대표하는 공인이 된 이상 앞으로 윤미향이 걸어야 할 가시밭길은 지금으로선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이 시점에서 아주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과거 암울하던 시절부터 우리나라 민주화와 선진화를 견인한 시민운동이 예의 진영논리로 휘둘리는가 하면, 경쟁사회의 최고 선(善)이라는 기부문화가 크게 폄훼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윤미향 사태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온다. 특히 보수 언론들이 윤미향 문제를 우리사회의 기부문화와 연결지어 각종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를 남발하는 데엔 안타까움이 앞선다. 이 때다 싶어 ‘기부 포비아’니 ‘흔들리는 기부문화’니 하는 말들을 마구 쏟아낸다.

흔히 말하듯, 기부의 전후과정이 투명하게 되려면 우선 해당 기관과 단체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후원자들이 자기가 낸 기금의 사용처를 적극적으로 알아보려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기부금이 과연 후원한 사람들의 뜻에 맞게 제대로 쓰여지느냐 논란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유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의 타킷의 되기 일쑤였고 지난 2007년 대선 때는 MB가 각종 부동산 추문에 시달리게 되자 자기가 살던 자택을 제외한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해 놓고도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피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 때만큼 기부문화에 대한 논란이 컸던 적도 없었고 그래서 나온 말이 기부하는 사람과 기부를 받는 사람의 이른바 양자 ‘순수’론이다.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30여년 전 지역 주재기자 시절, 당시 경제력을 상실한 조부모를 모시고 어렵게 사는 소녀가장을 기사화하며 일종의 모금활동을 벌여 일정액의 성금과 세탁기 등을 후원받아 전달한 적이 있다. 한데 며칠 후 관련 미담사례를 제보했던 동네 분으로부터 걱정어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소녀가장이 성금을 엉뚱한 데에 쓰고 다닌다는 우려였다. 운동화가 그 때 유행하던 나이키로 갑자기 바뀌고 옷도 새 것으로 달라지며 외모의 치장까지 이상해(?)졌다고 한 걱정을 했다. 사춘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후원해준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다시 현장을 방문해 면사무소의 믿을만한 분에게 성금이 든 통장을 부탁하고서야 고민을 덜 수 있었다.

 

물론 후원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낸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를 확인하고 감시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기부나 봉사라는 것 자체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얘기처럼 원초적인 믿음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기부자나 후원자가 모든 과정과 내역을 일일이 공유하기란 쉽지가 않다.

시민단체들이 공인된 계좌로 후원금을 받고 또 주기별로 수입, 지출 현황을 회원들한테 공개하는 것만도 투명화의 큰 계기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오래전부터 이를 실천하고 있는 지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들은 호평을 받고도 남을 만하다. 윤미향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다. 개인계좌로 후원금을 받고 또 그 내역을 대내외적으로 공개, 공시하지 않았다면 어떤 이유로도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낸 돈이 필히 당사자들을 위해 쓰일 것으로 믿는다. 수혜자를 짚어서 맡기는 지정기탁은 이에 대한 신뢰를 더욱 높이게 된다. 기부의 절대적인 모티브라 할 수 있는 ‘절반을 나누는 행복(half of happiness)’은 이같은 믿음이 없으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기부는 주는자와 받는자 모두가 순수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거기에 사(私·邪)가 끼면 안 된다. 과거 지역사회에선 부정비리로 수사를 받던 사람들이 인신구속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바터(barter)’로 공익재단을 만들어 기부금을 낸 사례도 있지만 그 순수성에선 지금까지도 여론의 눈총을 받는다. 또한 다중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시민운동 등 사회활동을 하다가 이를 계기로 개인의 입신을 꾀하는 것도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굳이 그러할 뜻이 있다면 일정기간 시차(term)를 두는 게 맞다.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지난했던 배움의 과정을 되새기며 전 재산을 후세교육을 위해 기증함으로써 기부의 진정성을 몸으로 실천했다.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며 한 푼도 남기지 않았고 딸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뛰어 놀게 하라”며 자신의 묘자리 주변 5000평만 물려줬다고 한다. 이같은 순수함이 있었기에 그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들어서기도 전에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고(1939년)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이에게 경영권을 물려줘 국내에선 지금도 겉돌고 있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역시 최초로 선도하고 은퇴했다.(1969년)

로마 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켜준 힘은 가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였다. 로마가 타락하기 전까지만해도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세기의 기부왕으로 칭송되는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외쳤다.

우리나라에서 기부는 사회의 통합과 연대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현재를 기준하더라도 빈부격차와 이념·계층갈등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를 위무할 수 있는 것은 기부문화의 확산 밖에 없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통큰 기부가 사회공동체에 대한 동질감을 심어준다면 남대문 시장과 육거리 시장 등에서 평생 배곯아가며 살아온 못가진자들이 인생 말년에 전재산을 선뜻 내놓는 기부행위는 사회공동체의 가장 소중한, 인간에 대한 ‘감동’을 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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