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최초 연구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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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의 최초 연구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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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1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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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5월 한국에 온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꾸랑이 첫 연구자
한국서지에서 직지 소개, 한국의 고서 세계에 널리 알려

 

직지는 19세기 말에 꼴랭 드 플랑시가 수집하여 1900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하면서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전시가 끝나고 직지를 최초로 연구한 인물은 모리스 꾸랑이었다.

꾸랑은 186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85년 동양어학교 중국어과와 일본어과에 등록하여 1888년 두 개 과를 모두 졸업하고, 북경주재 프랑스공사관에 수석 통역관으로 근무하였다.

꼴랭 드 플랑시의 대학 후배 꾸랑
꾸랑은 1890년 5월 23일에 주한프랑스공사관 통역서기관으로 전속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초대 대리공사였던 플랑시가 유일한 동료이자 상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꾸랑은 13개월 동안 플랑시와 함께 근무하면서 한국의 문화에 대하여 전반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플랑시는 꾸랑을 설득하고 권유하여 한국의 고서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했다.

모리스 꾸랑
모리스 꾸랑

 

그 결과 꾸랑은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eenne) 3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91년 6월에 초대 공사의 임무를 마치고 한국을 떠난 플랑시가 자원하여 총영사겸 주한 3대 공사로 1896년에 다시 서울에 부임, 한국의 고서 등을 수집하여 꾸랑으로 하여금 한국서지 보유판 작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꾸랑이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서지의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 사람은 뮈텔주교였다. 21개월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였음에도 3,821종의 도서를 한국서지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랑시와 뮈텔주교가 후에 보내준 각종 고서와 그에 대한 해제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서지는 본래 1891년에 조선문헌일람이라는 서명으로 동양어학교 총서로서 출판하기로 예정되었으나, 간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1892년 북경에 머무는 동안 한국서지의 작성은 부진했으나, 행정, 의례, 불교, 도교 부분은 완성된 상태였다. 꾸랑은 파리로 돌아와 다음 해 1월에 동양어학교 학장의 딸 셰퍼와 결혼하여 반년 정도 파리에 머물다가 동경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뮈텔주교에게 계속해서 한국의 참고자료를 요구하는 한편, 자신은 일본 우에노도서관과 조죠지에 소장된 한국 전적을 조사하였다. 1894년 동경의 인쇄소와 한국서지에 대한 인쇄 계약을 맺고 1권을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1895년 다시 중국 톈진으로 전속되어 한국서지 2권의 원고는 프랑스로 보낸다. 3권의 인쇄도 진전되어 파리, 동경, 톈진을 오가며 1, 2, 3차의 교정이 이루어져 1896년 파리로 귀국한 후에 3권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학의 선구자, 모리스 꾸랑
그리고 플랑시는 한국에 2차로 부임하여 체류하면서 새로이 수집한 한국 도서들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하였는데, 꾸랑에게 서적들을 연구하여 해제를 붙이도록 부탁하였다. 꾸랑은 박람회가 끝나고 한국서지 보유판을 1901년에 동양어학교 출판물 총서로 출판하였다.

꾸랑의 한국서지는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연차적으로 1, 2, 3권에 3,240종의 고서에 대하여 서론, 교회부, 언어부, 유교부, 문묵부, 의범부, 사서부, 기예부, 교문부, 교통부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플랑시의 추가 수집 후 1900년 만국박람회 전시가 끝나자 1901년 581종에 대한 서적을 보유판으로 출판하였다. 따라서 총 3,821종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해제와 함께 소장처까지 자세히 수록하였다.

한국서지는 서론부분이 1912년 아사미에 의해 조선예문지란 제목으로 일어로 번역되고, 1936년 매시 로이즈에 의해 왕립아세아협회 조선지부 회보 제25권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다시 이 영역으로부터 1940년에는 오구라에 의해 한국서지서논이란 제목으로 일역되어 잡지 조선에 연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서론부분이 1946년 김수경에 의해 조선문화사서설이란 제목으로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974년 박상규에 의해 한국의 서지와 문화로 한글로 번역되었다. 박상규는 서론을 번역하고,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서지의 책 목록을 1번 반절부터 3821번 상무총보까지 부록으로 소개하였다. 이희재 교수에 의해 한국서지가 1994년에 완역되었으며, 1997년에 수정번역판이 출판되었다.

꾸랑의 한국서지에 수록된 도서 가운데 직지는 1901년에 간행한 보유판의 3738번에 소개되어 있다. 직지는 플랑시가 2차로 부임하고 나서 수집하였기 때문에 만국박람회가 끝나고 보유판에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3738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책. 대 8절판(제2권만 있음). 꼴랭 드 플랑시 소장

이 책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적고 있다. 1377년 청주목외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 주자, 즉 활자는 활자의 발명을 공적으로 삼는 조선 태종의 명보다 26년가량 앞서 사용된 것이다. 그 외에도 선광 7년이라고 쓴 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선광이라는 통치연대의 명칭은 1371년 원나라의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소종에 의해 사용된 것이다.

꼴랭 드 플랑시 장서표에 한국서지 3738 참고사항이 메모되어 있음
꼴랭 드 플랑시 장서표에 한국서지 3738 참고사항이 메모되어 있음
한국서지 보유판 3738 직지 소개 내용
한국서지 보유판 3738 직지 소개 내용

1800년대 서양의 열강들이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동양에 눈을 뜬 플랑시와 꾸랑은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익히고, 통역관으로 동양에 진출하게 된다. 중국을 거쳐 조선에 부임한 이들은 열강의 쟁탈전 속에 빠져 있는 조선을 배우기 위해 조선의 책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에 이른다. 책과 인쇄문화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꾸랑은 한국학의 선구자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황정하 서원대 교양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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