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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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인문학
  • 한덕현
  • 승인 2020.06.2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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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트럼프에 대한 볼턴의 배신은 사실 트럼프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자신이 평생 해 왔던 부동산 거래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전형적인 장사꾼 리더십으로 백악관을 움직였으니 트럼프를 떠나는 사람들의 뒤끝 작렬을 이해할만도 하다.

코로나 사태와 흑인폭동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트럼프는 우리의 시각으론 초등학교 수준의 변덕스런 행동거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러니 배신은 참모들보다 트럼프가 먼저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도 볼턴의 행위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볼썽사납다. 한 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사람을 임기도 마치기 전에 그런 식으로 공격한다는 게 인간의 도리라는 측면에선 어쨌든 부적절해 보인다.

지역에선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의사당 구조도 익히기 전에 선거캠프 종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해 연일 화제다. 다른 사람도 아닌 회계책임자라고 한다. 선거후 논공행상에 따른 보좌관 다툼이 빌미가 됐다고 전해진다. 통상 선거캠프의 회계책임자라고 하면 해당 후보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개인적으론 고소를 한 사람이나 당한 사람 모두를 좋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히려 사적인 이해에서 비롯되는 배신은 인간관계의 말초적 증상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시중의 입방아와는 달리 이 사건에 별 관심이 없다. 둘 사이가 어땠길래 그런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을까 하는, 같은 지역민으로서의 자책감이 더 크다. 공적 개념의 대의 문제로 주군에 반기를 들거나 혹은 자기 추종자와 결별하는 일은 그나마 명분이라도 있겠다.

대북전단 시비로 불거진 작금의 첨예한 남북갈등은 그 속내 또한 상호 배신감이라는 점에서 치유와 복원이 쉽지 않을 듯하다. 한 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문재인-김정은 사이에 “XXX,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는 거친 마찰음이 끼어드는 것같아 안타깝다. 바야흐로 배신의 계절이다.

배신은 말 그대로 믿었던 사람, 믿었던 관계로부터의 ‘배반’이기 에 이를 당한 상대의 내상은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상처로 인해 감정의 골은 더 심해지게 되고 급기야는 극단적인 반목까지 충돌질한다. 결국 배신은 인간에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부추길 뿐만 아니라 이 것이 심해지면 극도의 적대감으로 변질되어 천박한 부작용을 낳게 한다. 근자의 각종 배신행위가 신경쓰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박근혜는 자기 사람이라고 믿었던 유승민이 어깃장을 놓자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라”고 외치다가 지금의 몰골이 됐다.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한다.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런 관계를 통해 상대의 말 한 마디에 살아갈 용기도 얻고 마음의 상처도 받는다. 하물며 배신이야 어떻겠는가. 사람 사이의 가장 험한 것이 배신이라면 이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과 그 비용은 그야말로 형이하학적이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 남과 북이 서로 전단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70년대 북한에서 날아온 ‘박정희와 유명 여배우의 xx’ 삐라 처럼 최근 탈북단체들이 북으로 날린 ‘이설주의 포르노 xx’ 삐라는 이를 받아들 그 곳 인민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미친 놈들”

힘이 들거나 우울할 때 즐겨듣는 노래가 있다. 멜라니 사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the saddest thing)’과 톰 존스의 ‘딜라일라(deliah)’ 그리고 양희은의 ‘한계령’이다. 한물 간 노래들이지만 삶에 있어서의 별리(別離)나 상실(喪失), 회한(悔恨)의 감정을 이들 노래만큼 절절하게 표현하는 것도 없다. 특히 연인의 배신을 노래한 딜라일라는 톰 존스가 나이가 들어 중후한 톤으로 부른 것이 압권이다.

경쾌하고 강렬한 플라맹코 리듬이지만 그 가사는 ‘여친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남자가 결국 그녀를 죽인다’는 다소 살벌한 내용이다. 배신에 대한 심적 고통과 이로 인한 적대감, 그리고 그 상실감 속에서도 뭔가 복수의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의 인간적 번뇌가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리에 그려진다. 노래에는 울림이 있다는 의미를 실감하고도 남는다.

 

배신은 이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상대를 혐오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당사자의 삶도 굴곡져 진다. 한 쪽이 아닌 양쪽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다. 장동건 유호성 주연의 영화 ‘친구’의 엔딩 크레딧을 응시하며 관객들이 마지막으로 음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이다. 이를 미화하여 사람들은 ‘배신의 철학’이라는 말도 만들어 냈다. 배신에는 독선적 자기애(愛)가 작용하고 또 반드시 상대성의 산물이라는 것 등이 그렇다.

나이가 들어 입에 좀체로 올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 ‘의리’다. 김보성은 눈만 뜨면 의리!를 외치지만 젊었을 땐 흔하게 호기로써 구사하던 이 말이 요즘은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진정으로 이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지도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의리라는 물리적 행동의 표현보다는 그저 상대에 대한 정서적 배려 정도라도 실천하며 살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겠다.

이제서야 이런 판단이 선다. 배신은 관성이라고... ‘한번 배신한 놈은 또 다시 배신한다’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렇다면 배신의 계절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그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배신에 대한 종교적 관점은 상대를 믿음의 대상 이전에 오로지 사랑으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배신이 아니라 배신의 할애비라도 죽을 때까지 믿을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사람 두 명만 모여도 거기엔 반드시 이견과 갈등이 생긴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믿고 이해하는 건 나밖에 없다. 트럼프-볼턴, 국회의원-캠프종사자, 문재인-김정은 사이의 배신감에 대한 해법도 결국 각자에게 답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진정성있게 사랑으로 대하려는 배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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