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과 차기 대통령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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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과 차기 대통령의 조건
  • 한덕현
  • 승인 2020.07.0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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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요리연구가 백종원을 김종인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호출(?)한 것은 예상외로 효과가 괜찮았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물어뜯으며 얼굴부터 붉히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식상한 많은 사람들이 “그래! 백종원이 백번 낫다”를 외친 것만 봐도 그렇다.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전국의 골목식당을 하나 둘 정상화시키는 백종원의 활약은 언제봐도 신바람난다.

백종원을 대통령후보로 언급한 김종인의 의도가 벌써부터 백가쟁명을 구가하는 집권여당 후보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미래통합당의 잠재적 대권주자들에게 ‘메기효과’를 안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어눌한 말투의 김종인 특유의 ‘판 흔들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밉지가 않았다.

내친김에 네티즌들은 아예 ‘개 대통령’으로 불리는 강형욱과 요즘 트로트 대세인 임영웅, 영탁까지 대통령감으로 거론하며 우리나라 정치문화의 일대 변화는 국민들의 단순한 바람이 아닌 시대적 소명임을 시위하려 했다. 아닌게 아니라 반려견의 어떤 문제라도 척 척 해결하며 가정의 평화를 찾아주는 강형욱이 개 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대통령이 되고도 남겠다. 그가 전문 식견과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원해 난폭한 반려견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장면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또 마음의 힐링까지 얻는다.

시중의 입방아에 당사자들이 NO!라고 선을 그어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실 이들이라고 해서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꼭 정치인이나 명망가들만 대통령을 하는 건 아니다. 미국에선 연예인(레이건)과 부동산 투기꾼(트럼프)이 대통령이 되었고 마다가스카르에선 유명 DJ(라조엘리나)가 국가 수반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과테말라(모랄레스)와 우크라이나(젤렌스키)에선 코미디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기도 했다. 최근엔 진중권까지 가세해 “대통령 될 씨가 따로 있냐”고 물어 논란을 부추겼다. 이 말은 2002년 정지환의 책 <대통령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이까>가 원조로, 당시 고졸출신 노무현의 대통령 출마가 보수기득권층의 공격을 받자 이를 반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출간됐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아직 2년이나 남았지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미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를 시점이다. 과거의 사례를 들춰봐도 대선 2년 전쯤부터는 자고나면 대통령 후보가 한 명씩 늘어나 언론을 타기 일쑤였다. 이미 여권의 인물들은 이같은 추세로 벌써부터 이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원순과 이재명이 한 마디 했다하면 거기엔 반드시 차기 대권구도와 맞물린 해석이 뒤따르고 김두관, 김부겸도 이 판에 끼어들고 있다. 최근엔 추미애가 윤석열과 노골적으로 각을 세우자 역시 여성 대통령을 향한 ‘계획’이 시작됐다는 속덕공론이 일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를 원용한 것이다.

지난 2017년 대선의 최대 관점은 ‘이번 만큼은 반드시 성공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직할 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퇴임하고 나면 급전직하로 감옥에나 드나드는 대통령의 비극은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는 게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보면 이같은 국민적 숙원이 현 정권과 다음 정권에선 과연 이루어질 지 장담을 못하겠다. 여전히 국가의 모든 문제는 대통령 발(發)로 치부되고 있고 또 그 책임도 막무가내 대통령에게만 물으려는 후진적인 ‘대통령 인식’과 ‘대통령 문화’가 흔들림없이 횡행한다.

정치는 끝간데없이 진영으로 찢기고 국민들 또한 딱 반으로 갈라져 범부들의 하찮은 사석에서조차 서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낸다. 향후 정권교체를 겁박하며 ‘보복’이니 ‘복수’니 하는 말들을 입에 올리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언론들은 참으로 징그러울 정도로 한중·한일·남북 갈등과 조국 정국, 코로나 정국을 거치면서 국민들에게 저주의 DNA를 주입시키려 안달이다. 특히 수구언론의 논지를 보면 나라는 늘 개X이고 이러다가는 다 망한다며 일관되다. 이보다 더한 선동과 혹세무민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성공하는 대통령’이라는 국민숙원의 해결은 또 다시 다음번 대통령에게 의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기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우리는 그동안 다양한 부류의 대통령을 만나 다양한 통치를 경험했다. 아집의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리더를 만나고서는 끝내 그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혁명을 일으켰는가 하면(이승만),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로부터는 경제발전으로 위장한 폭력적 야만성을 목도했으며(박정희 전두환), 지난한 민주화투쟁을 거쳐 집권한 지도자를 맞아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시험으로만 그치고 마는 국가리더십을 아쉬워했다.(김대중)

내적 성숙보다는 의지만을 앞세우던 대통령 시절에는 세계화와 선진화라는 것이 통치자의 선언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자책하며 결국엔 국가파산이라는 쪽박을 얻어찼는가 하면(김영삼), 어쩌다 권좌에 오른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을 만나서는 그것이 얼마나 국가 미래에 무의미한 것인지를 똑똑히 목격하기도 했다.(윤보선 최규하 노태우)

또한 마이너 출신이 나라의 근본과 가치, 국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엔 얼마나 많은 수구기득권의 반발이 따르는지를 실체적 사실로써 경험했는가 하면(노무현), 아무리 성공한 기업가라도 생산적 국가통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으며(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국가와 국민의 소명보다는 개인의 전리품으로 착각한 단순 머리의 리더가 어떻게 나라를 그르칠 수 있는지도 실감했다.(박근혜)

이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고 자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조만간 내려지게 된다. 다만,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차기 대통령은 문 대통령의 선한 인내심 못지않게 행동할 땐 좀 더 과감하게 결단하는 리더십을 갖췄으면 한다는 것이다. 야당이 아니라 정적(政敵)까지도 대차게 만나 담판을 벌이는 쾌도난마형 차기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집권 후반기라서 그런지 이젠 탁현민식의 쇼맨십 정치도 식상하고 윤석열 논란을 지켜보자니 과연 인사권자가 꼭 그럴 수밖에 없을까 하는 답답증을 느끼게 된다. 요즘같으면 막가파 트럼프를 반만 닮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예측가능한 리더십이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일단 저지르는 오기와 독기도 필요하다. 국가통치는 상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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