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삶들(paradoxical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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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삶들(paradoxical lives)
  • 한덕현
  • 승인 2020.07.1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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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이런 단어가 어법에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역설적이고 모순되다. 잊을만 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이 현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안희정은 난데없는 충격을 안겼고 오거돈은 그 충격을 현실로써 재확인시켜준 꼴이 됐다. 그리고 이번 박원순의 죽음은 그 충격이란 것이 결코 돌발적이 아닌 우리들 삶의 상수(常數)는 아닌건지 오래도록 자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저런 식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를 그저 곱씹고 되뇌었을 뿐이다.

세 사람의 사건을 접하면서 놀라움 다음으론 그들이 우리사회에 남긴 업적과 기여를 우선 떠올렸지만 끝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건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같은 인간으로서의 자괴감이다. 진부하게 이성이나 본능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어차피 이성과 본능의 문제는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안고가야 하는, 적어도 이들 세 사람이 누린 사회적 신분이었다면 이 정도의 화두는 특별한 것이 될 수 없다. 상식으로 이해하고 적응하면 그만일텐데 현실에선 그들의 삶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몰렸다.

우리나라에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섬기는 리더십)의 전도사로 알려지며 직접 강연까지 한 켄트 키스 박사가 쓴 <anyway>라는 책이 있다. 국내엔 <그래도>라는 부제로 소개됐다. 그가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회활동을 하며 부딪치게 되는 갖가지 저항과 상실감을 이겨내보자는 취지로 역설의 10계명(paradoxical commandment)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를 하버드대학 시절에 더욱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인용된다고 해서 회자됐다. 박원순의 갑작스런 가출과 죽음을 뉴스로 전해듣는 순간, 돌연 생각난 것이 이 10계명 중 2가지다.

①사람들은 논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라(peoples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①아무리 큰 뜻을 가진 위대한 사람들도 소인배들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the biggest people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people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사건을 떠올리면 이같은 ‘역설의 계명’을 실감하고도 남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논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다. 이게 아니라면 형이하적인 비위를 그처럼 풀빵찍듯 똑같이 저지를 수가 없다.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들이 주변에 얼마나 넘쳐나는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은 그의 조카가 자서전에서 언급했듯이 초등학교 인성 수준의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모신다. 조카 뿐만 아니라 볼턴 등 그를 보좌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보면 트럼프는 영락없는 저급한 ‘문제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가, 이성의 인간들이 최고의 문명을 구가한다는 지금 21세기에 세계를 호령하고 있잖은가. 그 뿐인가, 아무리 공산국가이지만 그 곳도 분명 사람들이 사는 곳일텐데, 북한처럼 3대 세습의 국가 체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도 폭력 앞에선 한낱 가식에 불과한, 허접쓰레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밖으로는 지성인들의 집단, 그리하여 사회를 계도, 비판하고 여론을 창출, 이끌어간다는 언론인들이 안으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어 조직 내 각종 부조리와 비상식에 굴욕적으로 끌려 다니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자본과 오너에 대한 굴종이 언론계만큼 노골적이고 심각한 곳도 없다.

지난해 말 충북여성정책포럼이 충북여성계 10대뉴스 1위로 ‘성범죄’를 꼽았다. 미투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도 그 홍역을 피해가지 못했건만 사회는 여전히 남 녀 사이의 성(性)을 극복하지 못하고 온갖 추문들을 양산하고 있다.

 

굳이 고백한다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은 말 그대로 성차별적인 경우가 여전하다. 왜곡되고 시대에 뒤쳐진 전통적 관념의 남성성(masculinity)을 내세운 여성인식이 아직도 성행한다는 것이다. 여성성(femininity)이라는 것도 남녀라는 성의 동등함보다는 상대적 기호(嗜好)와 선택적 호감으로 따지려고 한다. 물론 여기엔 물리적 ‘힘’으로 상징되는 수컷의 우월성이 강조된다. 선출직의 명망가들로 하여금 자신이 고용한 비서들한테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만들도록 유혹한 ‘원흉’도 바로 이 것이다.

사회통념을 가장한 여성에 대한 일탈적 호기심은 언제든지 남자들의 머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나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세월을 살아왔고 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이들은 켄트가 말한 역설의 계명처럼 결코 논리, 합리적이지 못했고 또한 한 여성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멋대로 판단하다가 나이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성범죄라는 아주 졸렬한 소인배적 굴레를 쓰고 하루 아침에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이들이 살아 온 삶 전체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역설의 관점으로 그들을 평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한 켠으로 엄습하는 상실감은 떨쳐버리지 못하겠다. 본능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 인간 이성이란 것의 허구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한계, 흔들리는 갈대임을 또 한번 자각하게 된다.

박원순의 죽음에 대해 끝내 아쉬운 것은 그의 마지막 길이다. 가족장이든 뭐든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것이 피해여성과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한테 최소한의 신의라고 여겼는데 내 생각과는 달랐다. 이 역시 인간사의 ‘역설’로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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