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고, 또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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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고, 또 분노한다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0.07.2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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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강희 편집국장

근래들어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이었다. 그래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진보 정치인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서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 성추행 사건,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은 제1호 직장내 성희롱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향후 무수한 성희롱 사건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 직장내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이 때 생겼으니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 처음에는 이를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렀지만 여성계는 가해자 이름을 딴 신 교수 사건으로 칭한다.

박 전 시장은 신 교수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으로부터 “남녀간의 성적 관심 표현이 상대의 인격권을 침해해 정신적 고통을 준다면 위법”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6년간의 싸움 끝에 승소를 끌어낸 박 전 시장이 여성 비서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했다니 참으로 아니러니하다. 이 심한 배신감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한 여성 운동가는 “진보 정치인이라고 젠더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독재정권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젠더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일단 젠더의식이 있는 남자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잘라 말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에 분노한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 이후 여성시장을 뽑자, 비서를 남성으로 바꾸자, 자치단체장 집무실내 침실을 없애자는 등의 대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성폭력 사건이 없어지겠는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강화하고, CCTV를 늘린다고 달라지겠는가. 여성들이 그 때 그 때 분노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참담하다.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사건은 계속 나올 것이다.

이러한 때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최근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평소 느꼈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이 들어있어 놀랐다. 한여름 사무실 냉방온도가 너무 낮아 추위에 떨고, 스마트폰을 자꾸 떨어뜨리고, 마스크나 안전벨트가 너무 헐겁거나 꽉 끼어 불편하다면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세계가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해,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술, 노동, 의료, 도시계획, 정치, 경제, 재난상황 등 16가지 영역에 걸쳐 여성에 관한 데이터 공백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름철 사무실의 적정온도는 몸무게 70kg인 40세 남성의 기초대사율을 기준으로 해서 여성들은 춥고, 스마트폰은 여성들이 한 손에 쥐기에 크고 무거워 자주 놓친다고 한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남성들을 표준으로 삼아 설계된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위험에 빠지거나 아프고 때로는 죽어간다. 여성에 관한 데이터 공백이 여성들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달았다. 21세기에도 여성들은 이렇게 투명인간에 머물러 있다. 성폭력 사건을 중단시킬 만한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과 이 세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못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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