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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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대 이야기
  • 한덕현
  • 승인 2020.07.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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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청남대의 전두환 노태우 동상 철거문제는 지역을 옥죌 또 하나의 난제가 됐다. 단순히 찬반논란을 떠나 자칫 진영 간 갈등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충청리뷰가 지난 호에 이 문제를 기획화 한 것은 이런 우려를 의식해 불필요한 소모전을 차단하기 위한 대안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답은 없다.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애초 동상건립도 그렇고 또 최근 철거에 관한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충분한 공론화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도민들은 동상 문제에 대해 정서적인 불편함과 상처, 이른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1996년 청주3.1공원 정춘수 동상과 2015년 김준철 전 청주대 명예총장 동상이 각각 강제철거되면서 지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동상은 아니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석은 이를 어디에 존치하느냐 문제로 최근까지 무려 11년동안이나 논란에 휩싸였다. 현재는 청주 문의면 마동 창작마을로 옮겨져 있지만 추모석의 최종 안식처는 청남대라는 주장이 그치지 않아 이 역시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청남대를 만든 전두환은 쫓겨나는 문제로, 이 청남대를 도민에게 돌려준 노무현은 다시 돌아가는 문제로 지역사회가 내홍을 앓고 있는 것이다.

청주3.1공원 정춘수 동상과 고 김준철 씨 동상 그리고 청남대 대통령 동상의 한 가지 공통점은 이 것들이 표면적으로는 도민과 구성원들의 총체적인 지지와 동의로 세워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관료적이고 획일화된 접근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1운동 민족대표중 충북 인사 6인을 기리겠다고 1980년 8월 15일을 기해 건립된 3.1공원 동상은 공무원과 유족 대표들의 일방적 교감만으로 탄생했고, 청석학원의 장자였던 김준철 동상 역시 2012년 7월, 당시 학내분쟁이 시끄럽던 때에 학교 재단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에 의해 밀어붙여졌다.

2009년 역대 대통령 9명을 대상으로 처음(1차) 제작된 청남대 동상도 마찬가지다. 학계나 전문가들의 자문보다는 실적을 중시하는 담당 공무원들의 편의적 발상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그 옹색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 횡렬로 나란히 서 있는 작은 동상들을 보면서 대통령의 권위는 커녕 왜소함만 느꼈다.

그러니 가히 세계적으로 다이나믹(dynamac)하다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상, 정치적 사유의 탄력성에 이들 동상이 제대로 부응할 리가 없다. 3.1공원 정춘수는 민족대표 이후의 친일행각으로, 김준철은 교비횡령과 탈세 혐의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5.18로 대표되는 민족반역으로 각인돼 그들의 동상까지 수난당하고 당할 처지에 있다. 누구는 추모하고 추종한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반 사회, 반 역사의 인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난 주 기획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이라는 사실로 인해 관광지가 됐지만 오히려 ‘대통령’이란 것 때문에 명소화의 한계에 봉착한 측면이 크다. 대통령이라는 기계적인 상징성에만 집착하다보니 지금까지는 뭘 만들고 세우는 것이 청남대사업의 요체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 마디로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작위적이었다.

예를 들어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붙인 산책로를 걷다보면 대개는 그 풍광에 취하지만 정작 흥미를 끄는 건 중간 중간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과거 초소벙커와 막사 등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개방 초기에는 초병 등 군병력이 이동하던 산길과 철조망의 잔해들이 군데 군데 나타나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것들을 잘 살려 무슨 체험같은 것을 하면 훨씬 더 의미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관광지의 명소화는 스토리 텔링이 대세인데도 청남대는 ‘대통령’만을 너무 내세우다보니까 소소하고 자잘한 많은 스토리가 묻혀버리게 됐다. 재미는 이런 것에 더 있는 데도 말이다. 청남대가 개방되기까지 워낙 외부와 단절된 채 아방궁처럼 운용되다보니 그 속에선 사연도 많았다.

청남대로 대통령이 휴가라도 오게 되면 충북으로선 어쨌든 큰 호재가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들이 도지사 등 수급기관장들을 청남대로 부르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지역민원을 기습제의하면 대통령의 즉석 내락으로 성사될 수가 있었다. 이보다도 수급기관장들의 기대감을 한 껏 높인 건 대통령이 일일이 나눠주는 이른바 ‘청남대 떡값’이었다. 전두환 때가 500만원 내외로 가장 컸고 이후 노태우 시절에 금액이 작아지다가 YS부터는 아예 흐지부지되었다.

전두환은 부정축재의 정도가 컸던 만큼 청남대 이용시 ‘돈’에 관한 야사를 유독 많이 남겼다. 지금도 종종 측근들과의 골프가 물의를 일으키지만 골프광인 전두환이 청남대의 6홀짜리 간이골프장에서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이곳 장병들은 초비상이었다. 미리 잔디보수는 물론이고 골프장 곳곳의 나무 밑에는 인위적으로 낙엽을 예쁘게 깔아 기분을 맞췄다. 신역은 고되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즐겁게 한 것은 전두환의 두둑한 격려금이었다.

청남대에는 대통령의 기호에 따라 보병 외에도 별도 특수(?) 병과가 있었다. 골프병, 낚시병, 테니스병, 달리기병 등이 그 것이다. 전두환은 짐을 풀자마자 골프장으로 향했고 선수실력 못지 않다던 노태우는 여기만 내려오면 유독 테니스를 즐겼다. 김영삼은 눈만 뜨면 산책로를 달렸다고 하고 김대중은 이회호 여사와 손을 꼭잡고 조용한 산책과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청남대에서 즐겨먹던 음식도 성격에 따라 달라 전두환 노태우는 쏘가리회를 특히 좋아해 물건이 부족할 때는 도민들에게 잘 알려진 괴산읍 괴강의 매운탕 집에까지 청남대로부터 SOS가 전해졌다. 청남대 경비를 위해 인근 대청호에 수중 철조망이 치어져 근처 어부들이 여기에 구멍을 내고 몰래 잠입해 쏘가리를 찍어냈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 때는 청남대에서 10여km나 떨어진 대청댐 인근 현암사 주변까지 대통령 경호의 대상지였다. 대통령 방문을 앞두면 이 곳에서 탐침까지 찍어가며 경계를 했다. 지금도 맑은 날에 현암사 뒤 구룡산에 오르면 청남대가 가물가물 보인다. 나물등 채식을 좋아했던 DJ 때는 상대적으로 어부가 아닌 산나물꾼들이 분주했다.

이렇듯 청남대에는 대통령이라는 무거운 권위만 있는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 이런 것들을 발현시켜야 좀 더 친숙하고 살가운 명소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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