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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의 인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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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의 인쇄문화
  • 충청리뷰
  • 승인 2020.07.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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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에 청룡사는 목판인쇄
청주 흥덕사는 금속활자 인쇄
청주시는 흥덕사지 확인해 인쇄문화의 메카
지금 충주는?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서 이름 지은 것이다. 충주와 청주는 충청도의 계수관(界首官)으로 중원문화권의 중심고을이다. 한강 물길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때는 충주가 더 큰 고을로 취급받았으나, 철도와 고속국도가 주요 수단이 되면서부터는 청주가 훨씬 더 큰 도시가 되었다. 충주와 청주는 오랜 기간 동안 서로 경쟁관계가 되거나 상호 보완해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경쟁관계의 도시였다.

중원문화를 이야기할 때 이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을 꼽으라면 인쇄문화임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두 도시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청룡사 보각국사승탑
청룡사 보각국사승탑

 

목판과 금속활자 인쇄술의 차이
청주시는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찍어낸 흥덕사지를 확인하며 인쇄문화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충주에서는 직지와 비교되는 인쇄물인 목판본 『선림보훈(禪林寶訓)』이 보물로 지정되며 주목을 받았다. 이 『선림보훈』은 청룡사 연회암에서 발간된 책으로 고려말기 보각국사 환암 혼수스님에 의해 주도적으로 간행되었다. 이곳에서는 우왕 4년(1378)에 『선림보훈』과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이 간행되고 다음해에 『호법론』, 1381년에는 『선종영가집』이 간행된바 있다. 이 청룡사에서 간행한 책들은 4권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청주는 금속활자본를 가진 도시이고, 충주는 목판본을 간행하였던 도시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본인 『직지』와 목판본인 『선림보훈』의 간행연대를 보면 1377년과 1378년으로 엄밀하게는 직지가 한 해 앞서 제작되었으나, 뭐 거의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선림보훈』 표지
『선림보훈』이 충주 청룡사에 간행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청주에서는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는데 비해 충주에서는 목판에 글씨를 새겨 책을 만들었다. 흥덕사에서는 창의적이고 선진적인 방법으로 금속활자를 고안하여 책을 만든데 비하여, 청룡사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집하며 목판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 모두 불교관련 책으로 사찰에서 만든 책인데, 제작방법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흥덕사의 스님들은 새로운 인쇄방법을 고안하여 실행하던 창의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을까? 목판본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부터의 전통적인 방법이기에 충주의 스님들은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옹고집이고 지극히 보수적이었을까? 지역의 성향과 개인의 역량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인가? 물음표를 던져 보지만 쉽게 결론지을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마 경제력 즉 재정적 역량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속활자로 책을 만드는 것은 활자 하나하나를 만드는데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을 요하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쉽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고 오류를 수정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반면 목판본은 한쪽 한쪽마다 판목을 만들고 글을 써서 이를 새기고 판본으로 서책을 찍어내어야 되는 일이다. 나무를 선택하여 자르고 말리고 가공하여 판을 만들고, 여기에 글씨를 새기다가 한 획을 잘못 새기면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 되는 등등 손가는 일이 너무 많다.

청룡사 인쇄처 연회암 터는?
어린 학생들에게 목판과 금속활자 중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책을 만드는 것이 돈이 더 들까요? 하고 물으면 반반으로 갈린다. 금속활자는 쇠를 사용하기 때문에 돈이 더 들 것 같다는 의견과 목판은 나무로 판을 만들고 하나하나 새기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니 돈이 더 들 것 같다는 의견으로 나뉜다. 물론 정답은 목판본이다. 계량화된 것은 없지만 금속활자보다 목판으로 책을 만드는 것이 훨씬 큰 재정적 역량이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고려시대 충주의 경제적 규모는 청주보다 컸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책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좋았을 것이다. 두 지역의 청룡사와 흥덕사에서는 모두 불서의 간행을 열망하였고, 발행하고 싶은 책도 선정하였을 것이다. 청룡사에서 송나라가 발행한 중국 역대 선승들의 행적을 수집해 정선선사가 기록한 『선림보훈』을 선정하였다면, 흥덕사에서는 백운화상 경한 스님이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和尙)으로부터 받아 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선택하였다.

청룡사에서 전통적인 목판인쇄로 『선림보훈』을 비롯한 다양한 불서들을 간행하였다면 흥덕사는 재정이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직지』를 간행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청룡사와 흥덕사에서는 서로 대조되는 문화 사업을 벌였다. 재정적 여유와 긴박함이 방법의 차이를 불어왔고, 그 결과는 지금 두 지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 차이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청룡사가 흥덕사보다 각광을 받았을 것이나 지금은 역전이 되어 있다. 청주의 흥덕사는 인쇄문화의 메카로 평가받고 있는데 비하여, 충주의 청룡사는 한강변에 있던 조그만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청주 흥덕사지에는 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되어 직지축제를 개최하는 등 청주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데 반하여, 충주 청룡사에는 인쇄처로 알려진 연회암 터도 조사되지 못하고, 다만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보각국사승탑과 비석 등의 석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에서 흥망성쇠가 반복되듯이 과거의 넉넉함이 현재의 여유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풍요를 유지할 수 없고 밝은 미래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 길경택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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