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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흥덕사 터는 어떻게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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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흥덕사 터는 어떻게 찾았을까?
  • 충청리뷰
  • 승인 2020.08.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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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신고로 1985년 운천동 흥덕사지 확인
충청북도는 그 자리에 청주고인쇄박물관 설립

 

직지는 1377(고려 우왕 3)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이다. 흥덕사지가 1985년 10월에 확인되면서 정부에서 사적 제315호로 지정하였다. 충청북도에서는 그 터를 정비하면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를 창안하여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널리 알리고, 인쇄문화 발달사를 익히는 과학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1992년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그러면 흥덕사의 옛 터는 어떻게 찾았을까?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는 1984년에 ‘청주 운천지구 택지개발 공사’를 진행하였다. 공사 구역인 무심천변 절터공원놀이터 서북편에서 1970년에 최용문씨가 담장공사를 하는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동종(보물 제1167호)과 금동보살입상, 청동금구, 향로가 발견되어 매장문화재 신고를 하면서 절터임이 확인된 곳이다.

김정구 씨로부터 얻은 수확
택지개발을 위해서는 문화재가 출토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수적이다. 이에 충청북도에서는 청주대학교 박물관(관장 이동복)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그해 11월말부터 청주 운천동사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발굴조사를 시작할 당시에는 무심천 뚝방에서 산직말로 가는 길로 내려가 좌측에 민가와 안동권씨 효녀각이 있었고, 그 주위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흥덕사지 발굴현장
흥덕사지 발굴현장

 

운천동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이 지긋하신 김정구라는 분이 물어볼 것이 있다며 현장에 찾아왔다. 무엇이 궁금하냐고 하였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전을 살펴보니 당백전이었다. 당백전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발행했던 화폐였다. 일반적으로 설명을 듣고 볼일을 봤으면 가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분은 쭈뼛쭈뼛하더니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자신이 연당리에 살았는데, 개발이 된다고 해서 사직동 변전소 골목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댓돌로 사용하던 돌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돌의 생김새를 물어보니 면이 평평하며, 거기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볼 수 있냐고 하자, 자기 집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을 따라 집에 도착해 보니 탑에 사용했던 부재로 안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돌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을 해보니 그 위치는 양병산 아래 연당리 마을 남서쪽에 있는 밭이었다.

조사단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시작하였다. 밭으로 사용한 이랑에는 눈이 덮혀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부분에 묘소가 있었고, 그 주위에 주춧돌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밭에는 기와조각들이 즐비하였다. 발굴 조사단에서는 순간 절터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운천동사지 출토동종
운천동사지 출토동종
흥덕사 출토 청동금구
흥덕사 출토 청동금구
흥덕사 터를 확인시켜준 청동금구 조각
흥덕사 터를 확인시켜준 청동금구 조각

 

조사단은 이곳도 개발 공사로 훼손되기 전에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충청북도에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의 실사를 거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약 6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현장에서는 토목공사가 계속 진행되었는데, 이장하지 않은 묘소가 있어서 그곳을 돌려놓고 흙을 파내는 공사를 진행하여 완전했던 절터가 절반이상이 훼손되었다. 만약 묘소가 없었다면, 발굴도 하기 전에 절터는 완전히 훼손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 지역 언론에서는 “죽은 자가 산자보다 낫다”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즉, 묘가 옛 절터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흥덕사 터가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구’ 몸통 주워 온 시민
절터의 동쪽과 남쪽부분이 훼손된 상태에서 1995년 여름에 청주대학교 박물관(관장 김영진)은 자연부락 명칭을 따서 ‘청주 연당리사지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한국토지개발공사는 발굴조사가 끝나면 이 부지를 개발하여 학교부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발굴이 진행되는 가운데 외곽으로 도로를 개설하고, 아스팔트 포장까지 끝낸 상황이었다.

절터의 발굴조사가 진행되기 이전에 반출된 흙 속에 청동유물들이 섞여 운천동 일대에 흩어지게 되었다. 개인이 유물을 주워서 고물상에 팔았고, 고물상에서는 한 리어카분에 해당하는 유물을 문화재 매매업자에 넘겼다고 한다. 유물을 구입한 문화재 매매업자는 흙이 묻은 유물을 수돗가에서 하나하나 씻었다. 그 가운데 깨어진 청동조각에서 음각으로 ‘흥덕사(興德寺)’라는 글씨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름 동종업계의 사람들을 모아 대책회의까지 했다고 한다.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이 유물을 매매할 수 있겠느냐 등등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물을 소장한 문화재 매매업자는 고물상에 연락하여 흥덕사 글씨가 있는 유물 1점을 돌려주면서 발굴기관에 연락하도록 했다고 한다. 명문이 없는 다른 유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얼마 있지 않아 흥덕사 글씨가 새겨진 청동금구 조각은 발굴단에 들어갔고, 연당리에 이름을 알 수 없던 절터가 흥덕사 터라는 것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다. 학계에서 그토록 찾던 직지의 간행지 흥덕사 터가 확인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발굴지 내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고, 금구는 얼마든지 다른 사찰로부터 옮겨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굴단에서는 금속활자와 금속유물을 찾기 위해 절터와 흙이 반출된 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위해 금속탐지기를 이용하여 조사했는데, 황통10년 흥덕사명 불발 등 다수의 금속유물을 찾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흥덕대로 주변을 산책하던 개인이 금구의 몸통을 주워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충청북도에서는 이 유물을 회수하여 흥덕사명 금구 조각과 맞춰보니 딱 맞는 같은 유물이었다. 결국 공사로 인해 포크레인에 찍혀 두 동강이 난 상태에서 각각 발견되었다가 다시 한 몸이 된 것이다.
직지의 간행장소를 알려 준 흥덕사명 금구는 국가로 귀속되어 국립청주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두 조각을 붙이는 복원도 가능하겠지만, 교훈으로 삼기위해 깨어진 상태로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 황정하 (사)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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