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터키의 박물관은 모스크로 바뀌고 있을까
상태바
왜 터키의 박물관은 모스크로 바뀌고 있을까
  • 충청리뷰
  • 승인 2020.09.02 0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야 소피아와 카리예 박물관의 모스크 전환에 배경 있어

 

8월 22일, 터키 최고행정법원이 이스탄불의 유서깊은 카리예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7월에 그보다 훨씬 유명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바꾸는 결정을 내린 이래로 두 번째다. 이 일련의 결정들, 그중에서도 특히 아야 소피아의 용도 전환은 터키를 넘어 국제 사회를 동요케 했다. 한낱 박물관의 용도 변경이 국제 사회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유에 대해 알려면 먼저 터키 역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제는 모스크가 된 두 박물관은 본래 정교회 성당으로 건설되었었다. 중세 비잔티움 제국 시절, 도시 이름이 ‘콘스탄티노플’일 적의 일이다. 하지만 1453년에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정복하고 도시 이름이 ‘콘스탄티니예’, 혹은 ‘이스탄불’로 바뀌면서 성당의 운명은 바뀌었다. 예수를 기리던 유서 깊은 성당은 이제 정복자의 뜻에 따라 알라에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했다. 십자가, 성화를 비롯한 기독교의 상징들은 없어지거나 가려지고, 대신 무함마드와 알라에 대한 아랍어 기도문이 내부를 장식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 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더 지속됐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다시 요동쳤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성향의 군장교와 관료들이 신생 공화국을 이끌었다. 새로운 집권 세력은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열강에 당한 이유를 이슬람교에서 찾았다. 그들은 사회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이슬람이 터키의 근대화를 지체시켰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이제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쓸 수 없게 됐고, 과거 통용되던 이슬람법 샤리아는 서구식 민법으로 대체되었다.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알라에 기도를 드려온 모스크 역시 그 역사적 유래를 고려하여 박물관으로 전환되었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터키에서 아야 소피아라 부르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었다.

터키 아야 소피아 전경. /뉴시스
터키 아야 소피아 전경. /뉴시스

 

정부의 근대화 성적표 좋지 않아
문제는 세속주의 정부의 근대화 성적표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사회주의적 경제 계획은 비효율을 양산했고, 이스탄불을 위시한 서부 해안 지역과 동부 내륙 지역의 격차만 키워놓았다. 단순히 종교만 억제한다 해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또 종교가 억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급격한 이촌향도를 겪으면서 지역사회 기반을 잃은 많은 도시민들이 이슬람에 의탁하며 터키의 이슬람 교세는 더욱 강해졌다. 도시 빈민과 내륙 농민들은 머릿수를 통해 도시 엘리트들을 압박했고, 결국 군부는 중산층과 지식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까지 여러 번 일으키며 반대파를 찍어눌렀다.

이슬람은 군홧발이 짓밟는 와중에도 꿋꿋이 성장했다. 터키가 1980년대 시장경제로 선회하면서, 기득권 바깥의 중산층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이슬람을 문화적 자부심의 원천이자 경제적 네트워크로 활용했다. 가난한 무슬림 민중은 그 네트워크를 통해 신흥 무슬림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 둘의 동맹은 이슬람주의 정당인 복지당의 승리를 끌어냈고, 이때 이스탄불 시장이 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대통령 에르도안이었다. 군부의 압력으로 복지당 정권은 곧 종식되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2003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다시 선거에 승리했고, 이슬람주의를 자유주의와 조화시켰다는 평을 받으며 터키 경제를 눈부신 성장으로 이끌었다. 터키 국내외의 많은 관찰자는 드디어 터키가 민주주의와 자신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길을 찾았다고 에르도안을 상찬했다.

자유주의와 이슬람의 밀월은 8년가량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로 오면서 그 밀월에 점점 위기가 닥쳐왔다. 유로존 위기는 터키의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던 유럽의 권위를 처참하게 만든 대신, 아랍 봉기를 이끈 인근 무슬림 대중들은 에르도안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찾고 있었다. 이제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이 역내에서 터키의 이미지 형성에 더 유용했다.

2010년 이후 이어진 경제 침체
더하여 1인당 GDP 1만 달러 수준까지 성장한 터키 경제는 일종의 중진국 함정을 겪고 있었고, 이어지는 경제 침체는 국내의 자유주의 성향 중산층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야심가 에르도안은 이런 대내외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 동지였던 온건 이슬람 성향의 귈렌을 숙청하여 러시아와 긴장 국면을 조성했고, 반대 시위대를 무력으로 찍어누르며 정반대 모습, 혹은 진면목을 보여줬다.

이 전략으로 에르도안은 절대 권력자가 될 수 있었으나, 지지세력의 대거 이탈을 감수해야만 했다. 권력 균형을 깨고 적들을 외국 첩자로 몰아붙이는 정책은 인력 유출, 해외 투자 감소, 요동치는 리라화 등의 부작용을 내며 터키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트럼프와의 갈등으로 벌어진 환율급등이 대표적이었다. 경제성장을 믿고 지지해온 신흥 중산층이 정권에서 이반하면서, 집권 정의개발당은 이스탄불 시장마저도 상실하게 되었다.

아야 소피아와 카리예 박물관의 모스크 전환은 이런 배경 속에서 추진된 것이다. 빈민 대중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기존의 전략은, 이미 이전부터 그들의 역사적 분노와 박탈감을 자극하고 해소해주는 쇼로 대체되어 왔다. 무미건조한 ‘박물관’을 진정 대중과 호흡하는 모스크로 전환하는, 아니 ‘되돌리는’ 것은 그 쇼의 절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결코 충동적인 조치가 아니라 난마와 같은 터키 현대사의 문제가 집약된 상징이었다. 따라서 소피아 혹은 카리예 ‘박물관’을 다시 보기까지는, 적어도 그것이 박물관으로 존재해온 만큼의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학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