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사과’의 개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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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의 개성이 그립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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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효 경 정효경성형외과원장
   
지난 일요일 새벽 오랜만에 장거리 달리기를 하려고 나섰다. 올 가을로 예정된 풀코스 마라톤을 대비해 뒤늦게나마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풀코스를 완주할 때만해도 허겁지겁 뛰지 말고 앞으로는 착실히 훈련해야지 하고 다짐했건만 이번이 여섯 번째 풀코스임에도 여전히 준비에 소홀한 건 마찬가지이다.

문의에서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른 대청호 자락을 보면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풍경은 훈련부족의 어려움을 잊고도 남을 만큼 눈길을 끌었다.

상장삼거리를 거쳐 가덕까지 가는 내내 진초록 잎들로 눈이 즐겁고 그 내음에 마음까지 상쾌했다. 멀리 보이는 논에서는 벼가 장마를 이겨내고 쑥쑥 자라고 있었다. 옥수수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봉숭아도 한껏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차교를 건너 무심천변을 뛰다가 상대리 마을로 들어서니 여기저기 매어논 밭에 콩과 고구마, 감자, 고추와 참깨가 햇볕에 여물고 있고 과일나무들도 아직 여린 풋열매를 잎사귀 사이로 수줍게 달고 있었다. 달리다 보니 땅에는 더 자라지 못하고 떨어진 밤톨만한 감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미 떨어져버린 여린 과일이 제 나무 밑에서 뒹구는 것을 보니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야생사과’라는 수필이 떠올랐다.

소로우는 1817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살았다. 그의 경험을 기록한 ‘월든’은 19세기에 쓰여진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수감되었던 사건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국가권력의 의미를 성찰한 ‘시민의 불복종’은 인도의 간디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책으로 꼽히고 있다.

소로우는 ‘야생사과’라는 글을 통해 야성을 가진 야생사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데 야생사과의 맛을 농부의 말을 빌려 ‘활시위를 당길 때와 같이 짜릿한 맛’으로 비유했다. 이에 비해 접붙이기 위해 고르는 사과들은 맛이 순하다거나 크고 열매를 많이 맺는 특성, 또 과일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매끈하고 흠이 없는 점 때문에 선택된다고 하니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우등생이 되는 우리 현실과 통하는 점이 많다.

개량을 위해 선택한 사과품종도 부모나 선생님이 선호하는 학생유형과 너무도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독특함이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모든 아이들이 판에 박힌 주입식 교육으로 성적 잘 내기만을 강요받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그 결과로 소로우의 야생사과처럼, 바람과 서리와 비를 맞고 자라면서 기후나 계절의 속성을 흡수하여 찌르고 쏘는 맛을 간직한 채 생기 넘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순하고 개성을 잃은 평범한 사과처럼 길러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소로우에 따르면 사람이 식품으로 여기는 식물의 대부분은 사람의 보호의 손길에 의존하고 있는데, 야생사과나무는 사람에 의해 재배되던 종이 숲 속으로 흘러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생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 나무가 맞서 싸워야 했던 온갖 고난 때문에 더 달콤하고, 더 감칠 맛 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속에, 또 아이들 속에 있는 연화(軟化)되지 않은 야성을 간직할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가덕을 지나 다시 문의로 달려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먼 옛날 인류의 조상은 나처럼 달리기 훈련부족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달리기는 여가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일이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신소재 섬유의 운동복에 하이테크 운동화를 신고도 문명에 의해 퇴화된 근육에 갑작스러운 과부하를 주고 있을 뿐이다. 교육 문제도 그렇다.

아이들의 숨어있는 개성과 가능성을 찾아내기 보다 남들이 모두 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아이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작업을 신소재와 하이테크의 힘을 빌어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과부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야생사과가 지닌 풍미와 개성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 진정 우리에게 야성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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