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예찬(丹楓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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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예찬(丹楓禮讚)
  • 한덕현
  • 승인 2020.10.1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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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가을색은 하루가 다르다고 했다. 단풍 때문이다. 지난 달 28일쯤 전해진 설악산의 첫단풍 소식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덧 주변 나무들도 분위기를 달리 하더니 하나 둘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하루 20km씩 남하한다는 단풍이고 보면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충청권에서도 본격적으로 단풍을 만나게 된다. 속리산은 10월 말께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보됐다.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도 한껏 들뜨게 됐고 때맞춰 그동안 바깥 나들이를 옥죄어 왔던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고 있다. 코로나가 제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가을, 특히 단풍을 향한 사람들의 감정과 감상은 쉽게 억누르지 못한다. 어느 누구라도 가을이 되면 시인이 되고 예술인이 된다.

주말 산행을 오랫동안 함께 해온 지인 몇 몇은 이미 설악산을 다녀왔고 곧 다가올 지리산의 단풍 절정에 대비해 산행일정을 잡느라 일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은 곧 펼쳐지게 될 지리산의 가을 장관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피아골, 뱀사골, 연하천, 세석의 단풍도 다시 만나고 싶고 지난 5월 벼르고 별러 전구간을 탐방하며 지리산 최후의 처녀림, 그 숨겨진 자연의 장대함에 감동을 억제하지 못한 칠선계곡의 가을풍경도 직접 가슴에 품어 봤으면 한다.

지리산 단풍 하면 역시 벼슬을 마다하고 이 곳에 정착해 아예 자신의 아호를 지리산 사람이라는 뜻의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칭한 조선의 조식(曺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빨치산의 본거지인 지리산 피아골을 둘러본 후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이는 단풍을 봤다고 할 수 없다”면서 우리에게 삼홍시(三紅詩)로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다.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짜기에 들어선 사람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산과 물 그리고 사람까지 붉게 보였으니 단풍에 대한 이보다 더한 격한 감정도 없겠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는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고 했다. 이같은 피아골을 단풍 철에 맞춰 찾는 것만도 크나 큰 복이거늘, 마침 또 아는 지인이 그곳 피아골 대피소 지기와 아주 막역한 사이여서 그동안 몇 차례 그 단풍속에 묻혀 하루를 묵으며 오롯이 산기(山氣)를 느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단풍에 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걸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단풍은 그 화려함 뒤에 상실의 의미를 한껏 숨기고 있다. 단풍 자체가 날씨의 찬 기운으로 인해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며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나무의 생태로만 친다면 잎사귀의 마지막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중국 사서의 사자성어다. 잎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다시 낙엽으로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사진은 지난 해 10월의 피아골
사진은 지난 해 10월의 피아골

 

공교롭게도 이 말은 최근 검찰의 옵티머스 청탁 수사와 관련해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지난 2013년 혼외자 파문으로 옷을 벗을 당시 자신의 퇴임사에 마지막으로 언급해 화제가 됐다. 그 때 채동욱은 비록 자신은 권력의 외압으로 떠나더라도 떨어진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 다시 거름이 되듯 앞으로도 계속 검찰을 위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고 전해졌지만 원래 이 말에는 ‘떨어지는 잎사귀는 흙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올 때를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 더 강하다.

이렇듯 단풍의 이미지는 한편으론 슬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오히려 삶의 아픔과 비련, 고통을 읊조렸다. “핏빛으로 떨어지는 단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생의 입술만큼이나 요염하고, 폐결핵 환자의 각혈인 듯 섬뜩하며, 살육의 현장에 뿌려진 보복의 피처럼 처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제주 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그래도 단풍이 아름다운 데는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그 처절함에 대한 인간들의 동병상련이 한몫 한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단풍의 시기가 다가올수록 이를 맞이하기 위한 편안함보다는 자칫 머뭇거리다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부터 먼저 느끼는 이치와도 같다. 단풍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오는 것도 알림이 없이 슬그머니이고 가는 것도 눈깜짝할 사이다. 단풍의 끝은 더없이 아쉽지만 마지막을 불태우려는 인간의 삶은 더 더욱 서럽다.

하여, 단풍은 병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퇴장이다. 언제나 푸를 것만 같은 인생이지만 어느덧 늙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땐 짐짓, 아니 가슴 절절하게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 후회도 하고 자책도 하지만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을 자각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한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마지막엔 화려한 단풍으로 거듭났다가 홀연히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나뭇잎이 싱싱하고 푸르를 때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젊음을 이야기 한다. 그러기에 삶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완숙과 익음에 더 있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주변과의 조화와 어울림이지 결코 단절과 외면이 아니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한데 요즘 정치는 너무 상치되고 증오화됐다. 상대는 오로지 죽어야만 하는 불구대천지 원수가 됐고 이런 정치를 지켜봐야하는 국민들은 코로나만큼이나 지겹다. 이럴 때 여의도의 투기장에서 빠져나와 한강도 걸어보고 북한산도 오르며 가을과 한번 마주하기를 바란다. 지금 청주의 무심천과 미호강엔 억새와 갈대들의 향연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그윽함과 운치를 어찌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또 택배기사의 과로사라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주변엔 얼굴 한 번 들어 하늘 한 번 쳐다볼 겨를도 없이 너무 힘들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가을과 단풍 얘기는 사치로 들릴 뿐이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가까운 뒷동산이라도 올라가 보자. 코로나에 짓눌린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나’를 만나면서 말이다. 어차피 삶은 끊임없이 길들여야 하고, 가을은 그 자체가 사유(思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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