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와 천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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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넘는 박달재’와 천등산
  • 충청리뷰
  • 승인 2020.10.2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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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과 박달재 서로 다른 곳이면서 하나
중원의 밝은 내일의 상징으로 자리잡길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 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요즈음 트롯트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여성 트롯트 가수가 경쟁을 하는가 싶더니, 남성들만 참가하는 경연이 생기며 선발된 가수들이 채널을 돌릴 때마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각 도에서 뽑힌 노래 잘하는 트롯가수들이 경연을 하는데 충청도를 대표하는 노래로 들고 나와 부른 곡이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194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것인데, 박재홍이 노래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이 곡이 어느새 충청도를 상징하는 노래가 된 것이다.

이 곡의 배경이 되는 박달재는 제천시 백운면과 봉양읍 사이에 위치하는 고개이다. 해발 453m에 달하는 박달재는 시랑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치악산의 맥이 뻗어 백운산이 되고, 그 줄기가 남으로 향하며 구학산, 시랑산과 연결된다. 이곳의 박달재는 동서로 봉양과 백운을 잇고 멀리는 제천과 충주를 잇는 고개 길이다.

박달재입구 일주문
박달재입구 일주문

 

천등산은 충주시, 박달재는 제천시에
노랫말에 나오는 천등산은 충주시 산척면에 위치한다. 천등산에는 천제단(天祭壇)이 있어 충북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성화를 채화하는 곳이다. 천등산 자락으로 충주에서 제천으로 통하는 36번국도가 지나며, 이 산을 넘는 고개로는 다릿재가 유일하다.

실제로 천등산과 박달재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천등산은 충주시에 속하는 산이고, 박달재는 시랑산 자락이며 제천시에 있다. 그런데도 ‘천등산 박달재’로 같이 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충주시 산척면과 동량면에는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있다. 3등산 가운데 천등산은 셋 가운데 으뜸이다. 주역(周易)에서 천지인은 3재라 하여, 하늘이 나고 땅이 만들어진 연후에 사람이 창조되는 우주생성의 논리로 이해된다. 그런데 충주에 있는 3등산은 천지인이 아닌 천인지로 순서가 바뀌어 위치하고 있다.

이때의 천인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존재하는 우주질서의 진리라고 말한다. 즉 천(天)을 형이상학적인 이상으로 보고 지(地)를 물질로 생각하여, 물질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닌 물질을 지배하는 사람이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다. 태극을 중심으로 하여 선천을 후천이 대신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중심처가 삼등산 아래라는 것이다. 그래서 토정선생은 이곳을 만인지활(萬人之活) 하리라 예언했던 것이리라!

박달은 순수한 우리말로 한자 자체가 가진 의미는 없다. 박은 “밝다, 크다, 하얗다, 높다, 성스럽다” 등의 여러 의미를 갖는데 이것이 한자어로 “朴, 白, 弗, 不, 發”등으로 쓰였다. 달(達)은 단군신화 속의 ‘아사달’처럼 산이나 언덕 등을 나타내는 알타이어의 고어이다. 결국 박달은 백산(白山)으로 풀이 되는데 이 백산은 태백산, 백두산 등과 동일한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곳 박달재는 조선시대에는 ‘이등령’이라고 불렸다. 이는 천등산, 지등산에 연이은 고개마루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박달재 정상에 있는 박달과 금봉이 상
고려명장 김취려장군 대첩비
고려명장 김취려장군 대첩비

 

역사적인 사건 많이 발생한 박달재
이런 의미라면 천등산과 박달재가 같이 붙여져 언급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천등산이 신비롭게 보호되는 속에 박달재에서는 크고 작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1216년 거란의 3만 대군이 고려의 영토를 넘어왔을 때, 그 주력이 이 고장까지 침범을 했다. 이때 고려의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이곳 박달재의 지세를 이용하여 거란에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 후 예기가 꺾인 적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또 1258년 몽골의 침입 때 고려의 별초군(別抄軍)이 이곳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기습하여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해 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박달재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 활용되었다.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과거시험과 얽힌 슬픈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로 보인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기도 했다.

또 박달재는 한말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던 곳이다. 호좌의진이 충주부를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였으며,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는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6·25전쟁 때는 충주에 주둔하던 미군이 이 고개를 넘어 제천 쪽으로 건너와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천등산 천제단
천등산 천제단

 

물론 ‘천등산 박달재’라고 하는 가사는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면 다리재와 박달재를 차례로 넘어가야 했기에 지리에 정통하지 못한 작사가가 혼동을 해서 벌어진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천등산과 박달재는 서로 다르면서 하나이고, 각자가 역할을 분담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대한 중원인의 큰 바람일 수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하나라고 생각하며 노래한 것은 중원인들이 본래 하나라는 잠재의식 발로라 여겨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천등산 박달재가 중원의 밝은 내일의 상징으로 자리잡을 날을 기대한다.

/ 길경택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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