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수교와 北間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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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수교와 北間島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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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 二 斗(청주 관음사 회주)
   
小波 方定煥은 이런 어린이의 노래를 불렀다.
- 날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이것은 당시 민족의 가장 슬픔을 운 것이다. 조선을 南鮮 北鮮으로 나누어 말하던 習語가 있었고 間島에 다수의 동포가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별 삼형제라 했다. 날 저무는 하늘은 그때의 조국의 상황과 운명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북간도의 동포를 지칭한 것으로 빼앗긴 땅에서나마 동포의 떠나감을 우는 겨레의 고통을 어린이의 마음에 호소한 노래였다.

日帝 식민지 시대에 착취 기관인 조선척식회사와 금융조합에 토지를 약탈당하고 굶주림에 떨면서 男魚女大하고 살땅을 찾아 천신만고하며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가 정착한곳이 북간도. 지금의 중국 吉林省 연변 조선족 자치주인 것이다.

이들은 조국을 잃은 슬픔과 민족의 혼을 지키고 되찾아야겠다는 피맺힌 결심이 있었다. 후예들까지도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데에 우리는 경의를 안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 간도에 대한 것을 언급해 보고자한다.

한국과 중국은 간도를 놓고 서로 자기의 영토라고 하는 국경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종서 장군은 그 땅에 6鎭을 세우고 그 땅에 사는 오랑캐들로부터 조정에서는 조공을 받던 곳이다.

1600년 淸나라 건국과 함께 女眞族들이 중국본토로 이전하자 청나라는 이곳을 封禁地로 정하고 한민족의 유입을 금하였으나 韓人들은 내 땅으로 알고 찾아들어 淸人들과 잦은 충돌이 생겨 중국은 불투명한 국경관계를 조사케 하여 1912년(숙종36년)에 목극동을 파견하여 우리 측의 林權과 국경회담을 한결과 백두산 산정 定界碑이 세웠는데 碑文옇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이 있으니 그 분수령위에 비를 세운다」로 쓰여 있다.

土門江은 松花江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연변일대가 한국에 속하며 이 이상을 넘는 광역이다. 그러나 淸國의 말기에 와서 중국은 토문강은 두만강을 지칭한 것이라 우겨대어 조선 말기에 와서 국경논쟁이 또 치열했던 것이다.

1894~1895년의 淸·日전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900년(광무4년) 청국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했었다.

정부에서는 1902년 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北間島 管理使로 임명하여 이를 주한청국공사에게 통고하는 한편 여기에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증수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계속 관철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간도문제는 淸·日간의 현안문제로 넘어가고 일본은 1907년에 간도에 통감부 출장소를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 통감부 출장소 시설의 일본의 구실이었다.

전혀 중국은 간도에 간섭하지 못하였는데 일본이 러·일 전쟁 후 러시아에서 얻은 탄광 철도등 만주에 있어서의 이권문제가 엇갈리게 되자 양국협상을 통해 「청국은 일본이 간도가 청국영토임을 인정하면 만주에 있는 일본의 이권에 대해 양보 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1909년(융회3년) 9월4일 한국영토인 간도를 마음대로 청국에 넘겨주는 간도에 관한 淸·日협약을 체결 하였다.

이 또한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이 협약에 따라 통감부 간도출장소는 폐쇄되었으나 일본 총영사관으로 대체됨으로써 간도에 있어 일본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을 억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 집중화할 수 있는 효과가지 얻었다.

1909년 현재 간도지방의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8만2천9백 명으로 기록되었다.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定界碑를 무시하고 압록강 이남으로 한국영토를 규정한 것으로 된 것이다.

우리가 힘이 없다 보니까 우리 땅을 남들이 멋대로 농락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만주에서도 간도는 특히 우리민족의 대일항재의 근거지로서 이름이 드높이 남던 것은 많이 아는 사실이다.

간도협약에서 중국의 영토가 되었을 뿐이지 간도는 우리의 영토이며 우리겨레의 녹지의 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기는커녕 지금 압록강 두만강 이남도 분단 상태로 오랜 세월을 보내는 참상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남북이 통일되고 나면 중국과의 영토문제는 현안으로 대두될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두만강은 도문강이고 토문강은 松花江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확실한 것인데 국세가 약하다보니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청나라의 억지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간도협약에는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이라 기재했음)을 경계로 한다고 했으니 숙종시대에 정해놓은 국경정계비를 무시한 것이다.

정계비에 토문강은 도문강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던 청나라는 자기 고집대로 욕심을 챙긴 결과가 되고만 것이다.

정계비에 적힌 대로 송화강 유역이 우리의 땅이다. 숙종 때 朝淸조사가 범연히 되었을 것인가 많은 선조들이 자신의 나라로 시인하고 살다 간 그곳 또 지금도 수많은 동포들이 우리민족의 정신과 풍속을 그대로 지키는 우리 민족의 영토다. 그때 고국을 떠나는 불행으로 모여 갔지만 그곳에서 생겨난 후예들은 우리의 미래에 밑거름이 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이 시대의 사명이 있다. 첫째는 통일된 조국을 만들어 후손에게 넘겨주여야 하고 둘째는 淸·日간의 간도협약을 해소시켜 우리의 영토를 만들어 후손에게 주어야한다. 다소 경제적 부담을 안고라도 그것을 성취해야만 부끄러운 선조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해방 후의 간도(間島)의 변혁과 대부분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간도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영유권 분쟁을 겪다가 1909년 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과 중국이 체결한 간도협정에 따라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일본 식민지에 체결한 조약 모두 무효로 한다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에 의거해 한국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당시에 간도는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중국은 중국군과 공산군의 내정싸움이 계속되었고 북한은 정부가 형성되기 이전이었다. 이러한 때에 1948년 2월에 소련 중공북한이 체결한 평양문서가 나타났다.

이것에 따르면 동북지방의 일부를 3개 한인자치구로 확정하고 장차 한국에 귀속 시킨다고 했다. 이러한 시기에 6.25가 터진 것이다. 인민국의 전진이 대구를 조금 남겨두고 부산을 완전 포위상태에 이르렀을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탈환되고 부산을 포위했던 인민군이 총퇴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맥아더장군을 은혜로 생각하게 되고 인민군은 계속 후퇴해서 평양을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렀다.

이때 김일성이 갈 길이 막막해지자 압록강과 두만강이 갈라지는 곳 병오리에 짐을 푸는데 중공지도자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확언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한국과 유엔군은 총퇴각하고 서울로 후퇴 공산군이 평택까지 오고 인민군 정찰대가 천안까지 밀려왔다고 하니 그때부터 휴전 될 때까지 말로 옮길 수 없는 파란을 겪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중공군 간부들이 더 큰 은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그 후에 왜, 어떤 이유로 간도 땅을 중국에 양보했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북한과 중공은 1962년 비밀리에 국경협정을 체결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개인적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마침 중국에 가는 인연이 닿았다.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와는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시점이라서 홍콩에서 비자를 받아 간도에 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니 간도는 중국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간도를 중국에 넘긴 이유에 대해선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6.25때 도와주었다는 이유부터 김일성이 중국이 뜻있게 도와서 간도를 바쳤다는 등 중국이 마다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져간 것이라고-.

김일성이 간도에 있는 동포를 생각한다면 또 땅을 사랑한다면 죽어도 우리 땅을 달라고 빌었으면 간도는 그대로 가질 수 있었다고 분해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다. 땅이 공산주의면 어떻단 말인가! 내 땅에 살지 못하고 분해 자식한테도 우리말을 가르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살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있는 한 이 땅을 영원히 찾을 수 없어 원통하다는 것이다. 원래는 우리 땅인데 남의 땅이 된 것이다. 만약, 자유통일이 되고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현안문제로 나타났을 때 간도문제가 거론되면 우리 땅을 찾을 기회가 될 것이다. 백두산물이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백두산 물이 내륙으로 흐르면서 송화강이 되었다.

백두산 가는 길에 민속호텔에서 묵을 때 물소리가 세차게 들려 주인에게 물으니 송화강의 상류라고 일러주어 한참 구경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땅을 찾아야한다. 서쪽에는 서간도, 동쪽에는 동간도, 송화강이 이르는 곳을 북간도라 한다. 우리는 이 땅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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