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오장환의 마을, 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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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장환의 마을, 회인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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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정 환(시인)
   
▲ 류 정 환(시인)
회인은 현 회북면과 회남면을 아울러 일컫던 옛 이름인데, 요즘에는 회북면 소재지인 중앙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지난 9월 29일 회인은 아침부터 잔치로 떠들썩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오장환 시인을 기리는 오장환문학제 행사가 열린 까닭이었다.

이미 전날 내로라하는 문인ㆍ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학술세미나와 오장환 동시집 『바다는 누가 울은 눈물인갱(고두미)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진 터였고, 백일장, 시그림전, 자료전시, 오장환 시노래 콘서트와 같이 다채로운 행사가 하루 내내 진행됐다. 마침 생가 복원과 함께 오장환문학관이 개관을 하게 돼 그 의미를 더했다.

“누나야, 편지를 쓴다 / 뜨락에 살구나무 올라갔더니 / 웃수머리 둥구나무, / 조-그만하게 보였다. / 누나가 타고 간 붉은 가마는 / 둥구나무 샅으로 돌아갔지. / 누나야, 노-랗게 익은 / 살구도 따먹지 않고 / 한나절 그리워했다.” (오장환 동시「편지」 전문)
‘웃수머리’ 곧 ‘웃숲머리’는 중앙리(속칭 사잣골) 오장환의 생가에서 건너다보이는 마을이다.

옛 사람들이 꼽은 ‘회인팔경’ 중에 ‘북수청풍(北樹淸風)’을 들었는데, 이는 여름철에 ‘웃수머리’ 큰 나무숲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속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피서를 즐기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이렇듯 고향의 토속적인 정경을 배경으로 누나를 이별하는 소년의 서정을 그림 같이 그려냈던 시인 오장환.

그는 열 살까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안성으로 이사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고, 열네 살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웠다. 열여섯의 나이로 문단에 나와 김달진, 서정주, 김동리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또 이육사, 김광균과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며 첫 시집 『헌사』에 이어 『성벽』을 간행하여 ‘시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 ―그 전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던 시인은 정지용이었다.―는 찬사를 들었던 천재 시인이었다. ‘병든 조국’의 실체를 몸으로 인식하고 안타까워하며 광복기 이념의 혼돈 속에서 ‘씩씩한 나라’를 세우고자 고군분투했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8년 납ㆍ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제1회 오장환 문학제가 열린 1996년 이전까지는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만 회자되었을 뿐이다.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지역 작가와 연구자들의 10년 노력으로 오장환 시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

자치단체의 배려로 어렵사리 문을 연 오장환문학관은 전문 관리자를 배정하지 못해 한동안 찾아오는 이들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할 형편이다. 옥천이 정지용으로 하여 ‘향수’의 고장이 되었고 괴산이 홍명희로 하여 ‘임꺽정’의 고장이 되었듯이, 머지않아 각처 사람들이 오장환의 흔적을 찾아 회인으로 향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다급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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