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을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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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을 추모함
  • 한덕현
  • 승인 2021.02.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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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부음 소식은 늘 신선하다. 신선하다는 의미는 말로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잊거나 간과하던 그들의 이미지와 발자취가 돌연 엄습하며 실로 많은 생각을 몰고온다는 뜻이다.

엊그제 타계한 백기완 선생도 그렇다. 이미 갖은 언론보도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반추해내지는 못한다. 백기완을 떠올리는 사람마다 그를 향한 기억과 상념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만큼 그는 자기가 살아온 세상을 온 몸으로 껴안으며 모든 것을 불태우다가 갔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숱한 사람들이 SNS등에 각자의 소회를 간절하게 남긴 이유는 분명하다. 미안한 마음, 좀 더 같이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에겐 외람되지만 백기완만큼 살아생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나라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도 드물 것같다. 암울한 시절, 평생을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통일운동과 농민, 빈민운동에 전생애를 바쳤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비주류로 인식돼 왔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비리, 독재에는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며 힘없고 못가진 자들에게는 시대의 대부로 우뚝 섰지만 힘있고 가진 자들에겐 그저 가시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어찌보면 백기완이 제대로 평가될 즈음은 젊고 혈기가 분기탱천하던 시기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어느덧 많은 것을 내려놓고 뒤에서 조용히 후세들을 다독거릴 때인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시국이 하 수상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기억해 냈고 또 그의 용기와 인간적인 향수를 그리워하며 위로를 받았다. 그는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에게 백기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서울 종로와 동숭로 등에서 거침없이 토해내던 그의 사자후(獅子吼)다. 반백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 어둡던 시절에 ‘통일’과 ‘민중’을 외치며 두 팔로 활개를 칠 때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하겠다. 그 절정이 1987년 6월 항쟁과 그해 12월의 13대 대선 출마때다. 그가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를 군중들과 함께 합창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자리에 나와 환호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백기완은 그야말로 ‘해방구’였다. 종주먹을 쥐며 같이 울분을 토하고 같이 분노하며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평등을 외친 것이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 음성적으로 퍼진 것이 ‘장산곶 매’에 대한 얘기다. 장산곶은 백기완이 태어난 황해도의 서남쪽에서 중국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쭉 뻗어있는 돌출된 곳으로, 백령도에서 불과 15km 거리에 있는 반도형 곶이다. 해식 작용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처져 있고 이 곳에 둥지를 틀고 하늘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매의 우두머리인 장산곶 매이다. 성품이 용맹하고 사냥을 할 때도 주변의 자질구레한 꿩이나 토끼가 아니라 1년에 딱 한 두 번만 바다건너 중국이나 시베리아로 날아가 거친 날것들을 상대한다는 전설속의 주인공이다.

구전설화로 전해지는 이같은 내용을 백기완은 ‘장산곶매 이야기’라는 책으로 엮어 냈지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독재권력은 이를 금서로 정해 읽힘을 차단했다. 성깔이 드세기로 정평이 난 장산곶 사람들과 장산곶매처럼 이 책의 DNA가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반골기질을 키우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민중의 깨우침을 경계한 것이다. 실제로 백기완은 장산곶매의 신념으로 살았다. 죽임을 위협받으면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고 구차한 안위를 구걸하지 않았다.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광주민주화운동 공식 기념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이 1980년 12월에 썼다는 장시(長詩) ‘묏비나리’가 원전이다. 굳이 뜻을 붙인다면 남사당패의 마지막 마당극으로 순수한 근원 상태에서 축원하는 행위가 ‘비나리’이고 또 ‘뫼’는 죽음을 의미하는 ‘묘’이니 결국 아주 극단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기도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묏비나리'는 백기완이 옥중에서 고문 받던 중 창작했다고 한다.

이를 원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개사를 하고 그해 MBC 대학 가요제에서 은상을 차지한 김종률이 작곡한 것이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의 첫 소절처럼 백기완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들풀같이 거칠게 살다가 우리곁을 떠났다.

백기완은 충북과도 묘한 인연이 있다. 5공화국 출범과 함께 대대적인 탄압으로 심한 고문을 받게 되자 그 후유증으로 요양하던 중,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 동안 썼던 작품을 추려 ‘젊은 날’이라는 시집을 출판하게 됐는데 이를 주선한 사람이 충북대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던 전채린이고 전채린 하면 반드시 연상되는 사람이 친언니 전혜린이다.

전혜린이 누구인가. 1970~80년대 청년들로 하여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 완벽한 자유와 지성의 여성,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 유학도로 영원한 자아의 정신적 일체감을 순수와 진실, 열정으로 실현한 현대 여성의 아이콘이 아닌가. 그는 시대를 앞서갔고 또한 사람들에게 미래를 일깨웠다.

백기완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부르짖던 평화, 통일, 민중, 민족, 농민 등은 비로소 이제서야 빛을 발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소리높여 외치던 노나메기 세상,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은 코로나의 저주를 받고서야 지금 비로소 맹아를 싹틔우고 있는 것이다. 국가통치의 국민참여와 기본소득, 자본의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부의 공유와 이익의 공유는 백기완이 일찌감치 시대를 앞서 곧추세웠던 사상들이다. 이렇게 하면 언젠가 홀연히 나타날 그 ‘임’을 위해 그는 병상에서도 읊조렸다고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렇다. 당신이 동지도 간데없는, 깃발만 나부끼는 허허벌판에서 흔들리지 않고 앞서서 나갔으니 이제 남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남들이 권력의 공포에 숨죽여 살 때 분연히 일어서 외롭고 힘들게 어두움에 맞섰으니 백기완! 이제 편하게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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