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를 걷다’ 한범덕 청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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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를 걷다’ 한범덕 청주시장
  • 충청리뷰
  • 승인 2021.02.2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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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남주동 제수거리에서 태어나 그 근처에 추억이 많아”
1960년대 청주시내 전경
1960년대 청주시내 전경

 

 

한범덕 청주시장을 만났다. 청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 시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 시장으로서 청주를 살펴온 마음은 분명 특별할 것이었다. 시작은 남주동이었다. 우시장과 약령시와 장이 서던 곳. 도축장이 서고 피전거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피전거리를 따라 해장국집이 들어섰다. 약재상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약전거리가 생기고, 건어물 골목이 생겼다. 사람과 물자와 돈이 몰리니 자연스레 특화거리가 생겨났다. 그 때가 남주동의 호시절이었을까?

“태어난 곳은 없어지고 학교만 남았어”

한범덕 시장
한범덕 시장

 

"남주동 파출소 근처에 제수거리가 있었어. 거기서 태어났어. 제수거리가 뭔지 아나? 그래. 제사 용품을 파는 곳이야. 사과며 배가 넘쳐났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곳에 가면 옛날 생각이 나지. 초등학교 1학년 때 북문로 옛 청주역 인근으로 이사를 왔어. 도시재생허브센터가 있는 그 쪽이 예전에는 다 판자촌이었어. ‘하꼬방’이라고 불렀지. 아버지께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가세가 기울었어. 어머니께서 삯바느질 하시고. 시청 농협자리에서 화물자동차 주유소를 하시면서 생계를 꾸리셨어. 주유소 했다고 다 부자가 아니야. 이 골목에서만 스무 번 이상 옮겨 다녔을 거야.

만춘관이라고 중국집이 있었어. 건물은 없어졌지만 마당은 지금도 있네. 도시재생허브센터 터가 다 마당이었지. 그 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어. 학교 끝나면 거기서 뛰어 놀았지. 역 앞에서 자란거야. 한번은 우물에 빠진 적이 있어. 하루 종일 뛰어놀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씻으려고 물을 퍼 올리다가 우물에 빠진 거야. 다행히 가슴 높이정도 물이 차있어서 살았지, 더 깊었더라면 죽었을 거야. 지나칠 때마다 그때 생각에 웃음이 나.

자기의 추억이 어린 곳을 다시 가보고 싶은 건 당연한데, 다 없어지지 그런 건. 태어나고 자란 곳은 없어지고 동네만 남아있어. 그런데 동네도 다 변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 학교야. 공공의 장소는 안 없어진단 말야. 내가 다닌 모교 중에서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만 아직 남아있어. 내 헤테로토피아는 주성초등학교와 청주중학교야.

초등생일 때 웅변대회에 나갔던 한범덕 시장.
초등생일 때 웅변대회에 나갔던 한범덕 시장.

 

혼자 있을 때 가끔 가. 그리고 생각해. 해 질녘까지 뛰어놀던 생각, 공부하던 생각, 친구들 생각. 집이 가차우니까 지각을 자주해. 학교까지 3분밖에 안걸렸어. 집 가까운 사람이 지각하는 거, 왜 그런지 알아? 조절할 시간이 없잖아. 뛰어 가봐야 1분밖에 더 단축해? 많이 혼났지. 모범생이었어도 지각하면 혼나지. 그런데 다른 지각생들은 다 신나해. 한범덕이도 지각했다고. 초등학교를 이전해달라는 요구가 있는데, 그런 곳들은 뭔가 서글프지. 학교를 외곽으로 이전하고 거기에 아파트를 짓는 건 비극이야.

운동장이 지겨워지면 무심천에 갔어. 여름에는 발가벗고 멱 감고, 겨울이면 썰매타고. 얼마나 좋아. 지금은 못하지. 모두 추억의 장소들이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 헤테로토피아, 뭐 별게 있을까. 추억이 닿는 곳이 헤테로토피아가 되는 거지.

청주도 추억이 닿아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청주는 천 오백년 역사의 도시야. 아주 먼 구석기 시대가 아냐. 우리의 직근, 직접적이고 가까운 조상들이 살던 흔적들이 많아. 천오백년 전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까치내에 최초로 뿌리 내려서 남하한 거 같아. 그 길을 찾아보고, 흔적들을 살려내고 싶어. 그런 것들이 모이면 청주의 아이덴티티, 우리의 정체성이 되지 않겠어? 그걸 만들고 싶어."

 

1500년 연결된 크고 먼 헤테로토피아

사람의 수만큼 많은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한다. 그 곳은 일상의 장소일 수 있고, 일탈의 장소일 수 있다. 어쩌면 여행에서 만난 장소여서 일생에 단 한 번 갈 수 있는 곳일 수도 있다. 과거의 장소여서 이젠 갈 수 없는 곳일 수 있고, 다가올 미래에 만들어 질 공간일 수도 있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가상의 공간이나,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증강현실의 어느 곳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주동 제수거리에서 시작된 그의 헤테로토피아는 골목을 따라 흐르다 옛 청주역 앞마당을 기웃거렸고, 더 먼 과거의 정북동토성에서 시작된 길은 무심천을 따라 남하하다 북문로 어디쯤에서 마주 닿았다. 1500년의 시간이 연결된 크고 먼 헤테로토피아였다. 과거의 시간에 대해 듣는 동안, 미래의 공간이 그려졌다. 오래된 미래였다.

팽이를 돌리던 아이들이 놀던 자리에서 지금의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무심천에서 멱 감던 아이는 시장이 되었고, 시장은 지금의 아이들과 무심천 하상도로를 걷어냈다. 다가올 미래의 아이들은 다시 멱 감으며 여름을 보낼 수 있을까. 남주동의 호시절은 도래할 미래에 있지 않을까. 신화를 가진 역사가 아름답듯, 과거를 품은 도시가 더 풍요롭다. 남주동에서 정북동토성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헤테로토피아를 기대한다.

/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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