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삶의 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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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삶의 무늬다
  • 충청리뷰
  • 승인 2021.04.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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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표 와우팟 미디어Z 제작국장
청주 고샅길과 마실길 찾기 실행 중

 

코로나가 덮친 격리의 세상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이전보다 더 자신을 향한다. 나의 건강, 나의 안전, 나의 재산, 나의 외로움이 공공성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사그라트린다. 그런데 시선이 외부로 향할 수밖에 없는 직업군이 있다. 바로 기자다. 유력지가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흉흉한 시대에 맞서 이들은 대안 매체와 대안 언론의 시대를 열고 있다.

최근 와우팟 미디어Z에서 제작한 청주시 걷는 길 만들기 프로젝트 ‘길은 삶의 무늬다’ 영상을 봤다. ‘길’ 프로젝트는 이미 흔하다. 올레길과 둘레길이 전국에 있다. 그러나 기 후위기를 극복할 최선의 방안이 ‘걷기’일 때, 흔한 이동수단이 걷기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인터뷰 섭 외를 위한 첫 통화에서 그는 ‘기자’로 불러주세요, 라고 말했다. 사회적 위상이 아닌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 같았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문청(文靑)은 마을 신문을 제작했고, 불교방송국과 몇몇 신문사를 지나 이제 유사언론으로서 와우팟 미디어Z를 이끈다. 그가 기자로서 해 온 일들이 지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변화는 다양한 물결로 온다

서점 입구의 맨 첫 모서리, 베스트셀러 매 대에 지역작가의 책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판매부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충북지역출판·동네서점살리기협의회 ‘상생충북’을 만들었다. 취지에 공감한 20개 동네서점, 12개 고등학교, 시립도서관이 참여 하고 있다. 이익단체가 아니라 지역 운동이다. 추천도서 선정과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지역작가의 책을 지역에서 팔리게 했다. 선순환 과정에 서 상생충북은 자생력을 키웠다. 이 구조 안에서 지역작가가 살고, 지역출판이 살고, 동네서점이 ‘산다’. 파문이 판을 바꿨다. 그 물결은 다양하게 변주 중이다.

어린이날 청주 중앙공원, 뒷 줄 왼쪽이 이재표 국장
어린이날 청주 중앙공원, 뒷 줄 왼쪽이 이재표 국장

 

길은 삶의 무늬다

“매주 몇 분들이 모여서 걷고 있어요. 이야기 중심으로 길들을 발굴해서 청주의 걷는 길을 만들기 위해 모였어요. 제주에는 바다를 향해 이어지는 올레길이 있잖아요. 그에 비하면 청주는 특별히 볼 게 없는 도시일 수 있어요. 그래도 각자의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길에는 살아가는 흔적들이 남아요. ‘길은 삶의 무늬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고샅길’은 벽 사이의 좁은 길이에요. 그 길을 따라 옛 어르신들이 마실을 다녔어요. 청주의 고샅길과 마실길을 찾아보는 거죠. 걷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져요. 지워지고 있는 길들을 호명해보자는 게 취지입니다.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어요. 최근에 고은삼거리를 걸으면서 아름다운 길을 많이 발견했어요. 그 동네 귀촌하신 분이 계세요. 자연과 미술을 연구하는 분이에요. 이 분이 동네 어린이들과 함께 방죽과 담장에 그림을 그리고 장식을 설치했어요. 조경하시는 어떤 분은 소나무를 심은 사유지를 개방해 놓았더라고요. 몰랐던 장소들을 새로 발견하고 있어요. 이렇게 걷다보면, 정북토성, 문의, 미원을 꼭짓점 삼아 전체 한 바퀴를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동그랗게 큰 원이 만들어질 수 있겠단 생각을 해요. 최소 2년은 걸어야죠. 어쩌면 3년, 4년이 걸릴 수도 있겠죠.

차로 다니다 보니, ‘보행길’이 아닌 ‘차길’ 중심으로 사고를 해요. 율량동과 옥산이 멀다고 생각해요. 옛 날 사람들은 다 걸어서 다녔는데, 물만 건너면 되거든요. 가까워요. 걷는 길들이 있었는데, 걷지 않으니 사고 체계 속에서 지워졌어요. 차로 다니면 안보이거든요.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이렇게 찾아내다 보면 완성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해요.”

우리가 사랑한 모든 장소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모충동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주성초등학교를 다녔던 어린 이재표에게 구도심~무심천~서원대로 이어지는 등하굣길은 보물지 도였을 것이다. 아이가 걷기에 먼 길을 직선거리 대신 삐뚤빼뚤 걸어 다녔다며 그가 웃었다.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되어서도 가장 많이 걸었을 그 길이다. “수다방은 최근까지 간판이 있었어요. 키다실은 옛날이랑 위치가 바뀌고. 옛날 다방 위치도 다 기억나요.”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인가요, 라는 질문에 ‘장소’라기보다 취재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생애사나 마을사였던 거 같다며 멈칫거리는 그 대답이 어쩐지 더 미더웠다.

이재표 국장은 지도를 그리며 원도심 곳곳을 설명했다.
이재표 국장은 지도를 그리며 원도심 곳곳을 설명했다.

 

청주를 커다랗게 연결할 걷는 길을 만들겠다는 그 취지에 대한 미더움이기도 했다. 길과 기억은 이어져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약하지만, 감성과 감정으로 기억하는 것들은 힘이 세다. 아녜스 바르다의 말을 빌리자 면 “사람들이 자라난 장소뿐 아니라 사랑했던 장소들도 그 사람을 구성한다”. 장서가 많은 도서관보다 관계가 많은 도서관, 권위 있는 언론 매체보다 유사언론이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그를 구성하는 장소기도하고, 그가 사는 현재이기도 하다.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서 길 위에 섰다. 해가 지기 전 강렬한 빛이 공기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작정 걷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것들이 만들어 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에게 헤테로토피아는 특정한 장소가 아닌, 무엇으로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길’이다. 오래 걸었던 사람만이 다 질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러 모아 걷고,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미디어 Z와 두 발을 수단 삼아 성큼성큼 우리를 위한 헤테로토피아를 구축 중이다.

/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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