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背信)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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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背信)의 계절
  • 한덕현
  • 승인 2021.06.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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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박근혜 키즈 이준석은 주군 탄핵을 주창했고 지금은 과거 박근혜가 기사회생시킨 제1야당의 당수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은 윤석열은 임기 내내 임명권자를 괴롭히다가 이제는 정권교체의 최고 대항마로 부상했다. 역시 대통령 임명직인 감사원장 최재형은 월성 원자력발전소 감사로 문 정권을 곤혹스럽게 하더니 어느덧 그도 야권으로부터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려졌다.

이준석 체제의 국민의힘은 그동안 절대 지지층이었던 보수 강경 내지 수구세력들과의 관계에서, 송영길 지도부의 더불어민주당은 역시 지금까지 부동의 우군이던 민주화세대 및 강성 문빠와의 관계에서 이른바 ‘손절’하는 문제로 연일 논란이다. 각 각의 이유는 우리나라 정치사에 혁명과도 같은 변혁을 주도한 ‘이준석 현상’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정치발전을 견인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고, 또 국민의힘에 기습을 당한 더불어민주당이 다시 기선을 잡고 정권재창출에 나서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배신(背信)이다. 다름아닌 주군과 조직에 대한 배신인 것이다. 이준석, 윤석열, 최재형, 이들 세 명의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배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입력하면 관련 콘텐츠가 줄을 잇는다. SNS에서도 이들 관련 기사엔 ‘배신’의 딱지를 붙인 댓글들이 예외없이 달린다. 아예 둘의 관상까지 거론하며 폄하하기도 한다. 꼭 정치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사자간 파열음은 피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윤석열 최재형은 주군의 임기가 아직 시퍼렇게 진행중임에도 대권주자로 불린다. 과거 같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역모(逆謀)가 되기에 바야흐로 배신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당연히 신의를 저버린다는 뜻의 ‘배신’은 원초적인 의미에서도 부정적이다. 상대가 나한테 믿음을 줬는데 이를 내치고 역으로 대못질을 한 꼴이니 말이다. 이런 문제가 우리 주변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게 내부고발이다. 내부고발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구성원 및 조직 논리와 부딪친다. 당사자는 내부고발이라는 거사(擧事)와 동시에 그가 속한 조직으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지금도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지난한 삶을 살고 있는게 그 증표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주군에 대한 배신’이나 ‘조직에 대한 배신’은 그 정의가 결코 간단치 않다. 역사적으로 배신의 화신이었다는 신숙주를 보자. 밖에 내놓기가 무섭게 금방 쉬어터지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를 정도로 그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요즘 시각으로 치면 쿠데타를 일으킨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었고 이후 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 왕조에 걸쳐 그는 언제나 승리하는 쪽에 줄을 섰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외교와 행정으로 주군을 도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주역이 됐다. 그저 배신자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도 볼 수 있다. 전두환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한 장세동과,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점차 총기를 잃어가는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도 우리는 혼란스럽다. 전자는 의리라는 이미지 뒤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원흉, 후자는 반역이라는 꼬리표 이면에 우리나라 민주화에 특단의 계기를 제공한 의인일 수 있다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냉정하게 보면 윤석열과 최재형은 임명권자로부터 주문받은 이른바 ‘오더(order)’를 수행하다가 현 정부와 척을 진 꼴이 됐다. 2019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권력에 눈치보지 않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에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임해달라”고 했고 2018년 1월 최재형 임명식에선 “불공정의 관행이 행정부문에도 남아있을 수 있으니 그 부분을 잘 살펴달라”고 당부했다.

 

문제는 그들의 역할이 과연 본인들이 말하듯이 순수하고 공정했느냐는 것이다. 윤석열의 경우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이 검찰개혁이었는데도 그는 오히려 임기내내 뼈속까지 ‘검찰주의자’임을 유감없이 과시했고 이로인해 대통령의 인사권까지 위협당하는 지경이 됐다. 이준석이 당선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의) 공정 어젠다가 대선까지 갈지 확신하지 못하겠다”며 묘한 여운을 남긴 것은 윤석열로선 민감하게 받아들일 부분이다. 검찰 재직시 그의 운신이나 현재 구설수에 오른 가족문제는 어차피 앞으로 냉혹한 국민 검증대에 오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조직도 그 저변의 생리는 변화와 개혁에 매우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관행에 익숙할지언정 새로운 충격과 반발에는 여지없이 수구적이다. 조직이 스스로 알아서 변화하고 진화하기란 고목나무에서 새싹돋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내부고발은 바로 이를 깨기 위한 개인의 도덕적 숙명과 사명감의 발로이기에 그만큼 위험도가 크고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

그러기에 변화와 혁신, 더 나아가 혁명까지도 그것이 발현되어 성사되기까지는 조직내 특정인과 특정세력의 반골기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배신에 굳이 긍정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와 사회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소명’쯤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무리 작은 조직도 누군가는 관행과 관성을 거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만이 비로소 발전한다. 배신행위에 당위성을 찾는다면 바로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배신은 안타깝게도 조직의 변화와 발전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 특히 특정인을 향한 음해와 저주로써 감행되고 있다. 자신을 키워준 주군에게 비수를 꽂고 바로 엊그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만든다. 이거야 말로 조직에 대한 배신, 자연인으로선 마지막까지 회피해야할 배은망덕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추악하게 말이다.

배신의 굴레를 쓴 사람들의 운명은 필히 두 가지로 갈린다.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가치를 개척하여 한 시대를 풍미할 것인지, 아니면 결국엔 버림을 받아 몰락하든지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배신의 라벨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앞으로 운명은 어떻게 될지,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도 참으로 운명스럽다(?)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석열과 최재형에 대해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삶의 파란이 불가피한 대통령 꿈을 꿀게 아니라 그들에게 국가의 최고 중책을 맡길만큼 누구보다도 신임한 당초 임명권자의 바람대로 명예롭게 공직을 정리하고, 정리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정치사에 두고두고 살아있는 권력에 맞선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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