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상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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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상실을 찾아서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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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무 시인
   
어느새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길섶의 마른 풀덤불 위에 된서리가 하얗다. 빈 들녘의 살얼음 낀 논두렁이 겨울 햇살을 받아 차갑게 반짝인다.

내가 봄부터 새로 이사해서 쓰고 있는 사무실 뒤로 헐렁한 시골집이 한 채 덩그렇게 놓여있다. 그 집에는 올해 갓 팔십을 넘긴 노친께서 홀로 살고 있다. 사무실 2층 창가에 앉으면 담장 안으로 좁은 마당과 대청마루며 텅 빈 집 안팎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할머니 사시는 모습을 관찰하게(?)되었다.

지난 가을 내내 할머니는 참 바쁘셨다. 울타리에 노랗게 익은 호박 받침대도 해놓고, 텃밭에 김장채소도 실하게 가꾸셨다. 어느 날은 마당 가득 콩도 터시고, 지붕 위엔 빨간 물고추도 잔뜩 널어놓으셨다.

벼이삭 흔들리는 논가에 쪼그리고 앉아 낫질도 골똘하시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작은 체구에 참 바지런하시다. 내가 늦은 퇴근을 서두를 때쯤이면 툇마루에 혼자 앉아 적막에 밥 말아 허기를 달래신다.

온종일 의지가지없는 개 한 마리만 쫄쫄 따라다닐 뿐, 집안은 늘 고요로 가득하다. 자식들도 여럿 두었고, 모두들 대처에 나가 좋은 직장에 다니며 괜찮게 산다고들 하는데, 이들이 더러 찾아오는 기색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집안이 좀 시끌벅적했다.

하루는 며느리들과 출가한 딸까지 와서 김장을 담가 당일로 차에 싣고 가느라 그랬고, 또 한 번은 할머니가 그동안 가을걷이한 것들을 서둘러 가져가는 모습들로 그랬다. 그러나 그뿐, 추위는 다가오는데 할머니의 ‘오래된 정원’은 또다시 침묵으로 가득하다. 이웃의 말을 빌면 이 할머니도 몇 번 자식들 집으로 살러 가셨다가, 이내 다시 돌아오시곤 했단다. 집집마다 사정이야 다 있겠지만, 이처럼 늙은 어머니 홀로 빈집을 지키며 사는 모습을 이제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불문학자 곽광수 교수는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란 책에서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70-80년대 근대화의 징후로서 느껴지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이 오늘날 보다 분명한 일상적 현실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완전 경쟁이 기회와 번영을 공유하는 황금시대로의 안내가 아니라, 승자 독식의 사회로 이완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각축의 장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한국인의 정신지향적인 고유정서는 물론 서로 돕고 살던 공동체의식마저 파괴되고, 탐욕스러운 개인주의와 몰염치한 과소비풍조만 번지게 되어, 진정한 사랑의 상실의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현대사회의 부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쏠림은 필연적으로 약함과 주변에 대한 경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이웃들과의 사랑의 상실은 물론, 귀중한 육친의 사랑마저도 애써 외면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그 근원적 모정마저 잃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세대 앞에 질박한 오지항아리 같은 옛날의 어머니들은 이제 갈 곳이 없다. 다만 모진 생애를 남루한 누옥에서 어기차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140만부나 팔리고, <돈, 아는 만큼 보인다>, <대한민국 재테크에 미쳐라> 같은 책들이 주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이 위기의 현실 앞에,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목마름 같은 것은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하여 억울함이나 버려짐, 각피처럼 굳어져 일상이 되다시피한 외로움을 희미한 등불로 버티다가, 오늘도 설잠을 청하는 어머니를 우리 한번 가슴으로 가만히 불러보자. 오랜만에 울컥 치미는 뜨거운 속울음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가.

다시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물질적 풍요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린 어머니로부터 한번 찾아보자는 것이다.
오늘은 눈이라도 내릴 것 같다. 포근하게 어깨 위로 떨어지는 눈, 눈.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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