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난 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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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난 곬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7.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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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무 시인
   
설밑입니다. 명절 연휴를 앞두고 벌써부터 해외 골프 패키지 광고가 신문 하단을 장식합니다. 설 연휴를 가족과 함께 즐길만한 휴양지나 놀이동산을 알리는 사이트가 컴퓨터에 가득합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이 광속으로 변해가는 문명의 이기 앞에 그 본래의 미풍양속을 상실한 지는 꽤 오래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여기 ‘여우난 곬족’이라는 백석(白石 1912-1995)의 시 한편을 소개할까합니다.

백석은 소월과 같이 평북 정주가 고향이어서 그의 시에는 독특한 서도 방언을 많이 구사하고 있습니다.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표준어 표기를 달았으며, 또한 소개하는 시가 서사적 구조를 가진 장문이어서 군데군데 생략하여 게재합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아버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홀아비의 후처가 된 …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오리치(오리덫)을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밴댕이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안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끼니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뿍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기를 하고, 숨굴막질(숨바꼭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아랫방)에서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공기놀이)하고, 쌈방이(가짜 싸움놀이)굴리고, 바리깨돌림(주발 뚜껑놀이)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 구손이(서로 다리를 끼고 노래를 부르며 손으로 다리를 세는 놀이)하고, 이렇게 화디(등잔을 얹는 기구)의 사기방등(사기등잔)에 심지를 몇번이나 돋구고 홍계닭(새벽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 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득거리다가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처마의 안쪽 지붕)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민물새우에 무우를 넣고 끓인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이 시는 명절날 아침부터 그 다음날 저녁까지 ‘여우가 나타나는 골짜기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큰집에 모여 새 옷을 해 입고, 차례에 쓸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은 또 저희들끼리 민속놀이를 즐기는 명절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암흑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꽤나 촌스럽고 특별히 잘나지도 못한 가족 구성원이지만, 따뜻한 공동체적인 삶의 공간 속에서 대가족이 한데 엉켜 혈육의 정을 나누며 흥성스럽게 명절을 보내는 모습들이 실감나게 우리의 가슴을 관통합니다.

북방 언어와 서도 풍속이 다소 낯설기는 합니다만, 물밀듯 밀려오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와 지난 시절 우리가 간직했던 소중한 가치를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이제는 까마득한 전설 속에 묻혀버린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우리의 핏속에 녹아 흐르는 뜨거운 사랑이 살아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한낮 남루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우리는 정녕 저 ‘뜨거운 흥성스러운’ 세상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피안의 세계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김훈이 쓴 대로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르면서 그 사랑의 회복을 포기 한다면 그런 사랑은 무가치한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명절 풍속을 조금은 예스럽게, 우리가 지녔던 가치의 절반만이라도 복원할 수는 없을까요.

올 설에는 한 번 크게 마음먹고 고향의 부모님과 더러 남아있을 일가친척들과 설 연휴를 몽땅 보낼 생각으로 처자식 데리고 귀향열차에 몸을 실어보지 않겠습니까. 그들과 함께 식구들 숫자만큼 윷도 놀고, 엿을 치고, 술을 고이면서, 그리하여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들’을 가슴 벅찬 눈으로 바라보기도하면서, 지치도록 한껏 명절을 즐기다가 돌아오면 정말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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