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도종환 시인의 6박7일 북한 방문기-‘내가 그 곳에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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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도종환 시인의 6박7일 북한 방문기-‘내가 그 곳에 있었네’?
  • 충청리뷰
  • 승인 2002.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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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아침 남쪽으로 출발하기 전 전체 모임을 가졌다. 방북 성과를 정리하고 그동안의 일정을 평가하기 위한 성격의 모임이었다. 김동완 목사는 우리 모임의 창구를 단일화하자는 것과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히고 3당을 방문해서 설명하자는 것, 그리고 후속모임을 갖자는 제안을 했다. 실무책임을 맡았던 변진흥 사무총장은 이번 방북의 성과는 부문별, 단체별 모임에서 많이 나왔으니 그걸 집중화하자는 것과 앞으로도 민간차원의 교류를 넓혀야 한다는 말을 했다. 만남 그 자체도 성과라는 말이 나왔고 개폐막식 참가와 관련한 우리끼리의 앙금은 씻고 가자는 제안과 함께 향후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진로와 방향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사업을 통해 하나되자는 말도 나왔다.
각 부문 단체별로 합의한 성과는 다음과 같다. 여성단체는 빠른 시간 안에 남북여성들이 통일대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족 화해에 여성들이 앞장서기로 큰 이견 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실무협의는 북측에서 팩스로 전송하면 시간 장소는 추후결정하기로 했다. 청년학생들은 청년 학생대회를 금강산에서 10월경에 개최하기로 했고, 한민족 운동협의회는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얼과 민족통일에 대한 모임을 갖기로 합의하였다. 종단에서는 일본 교과서 왜곡과 신사참배 문제 등에 대한 국제회의를 갖기로 했고, 교과서 왜곡과 관련 등 외세 일본 문제에 대해 손을 잡고 일을 하고 내년 6.15행사는 제주도에서 하자는 것, 8.15행사는 서울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것,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문제 등에 남북 종교인들이 함께 대처하자는 것 등을 논의했다.
유교 측에서는 향교복원과 교류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불교교단도 남북 문화재 공동 관리를 위해 북쪽의 60여 개 절에 단청원료를 지원하기로 했고 특히 남의 7대종단과 북의 4개 종단이 종교기념일에 상호방문을 하기로 했다. 노동계는 북의 3대 직총과 10월 중순경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 회의의 1차 대표단회의를 갖기로 했다. 농민들은 종자교환을 통해 북쪽에서 필요로 하는 종자를 주기로 했으며 남북 문학작품 낭송회 등 문화예술교류도 계속하기로 했고 10시 30분에 이런 내용이 포함된 북과의 공동보도문이 발표되었다.
특히 공동보도문에서 민족의 안전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민간단체들이 적극 연대한다는 점이 들어 있었는데 민간차원에서 평화정착문제를 논의한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이다. 그리고 내년 8.15행사 때는 서울행사에 북의 대표단이 오기로 했으며 앞으로도 남북 민간교류협력을 지속하며 교류협력의 폭을 넓혀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큰 성과 중의 하나였다.

납·월북 문인들의 생사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자리를 옮겨 북의 평론가 조정호씨 옆에 가 앉았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납·월북 문인들의 생사였다. 우선 ‘모밀꽃’의 시인이며 전쟁 중에 월북한 충주의 정호승 시인 생사를 물었다. 조정호씨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본명이 정영택이고 48년 남북협상 때 김구선생과 함께 북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했지만 잘 모르겠다고 한다. 북에서 문인으로 활동을 안 했거나 전쟁 중에 사망했거나 무슨 이유가 있겠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정지용시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후퇴 중에 미군비행기의 기관총소사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수필가 석인해씨가 그 옆에 함께 있었는데 “사람 죽는 건 모르겠더라. 순간이더라.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려 순간적으로 흩어졌는데 비행기가 가고 난 뒤 안 보이기에 찾아보았더니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묻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평상시에 자주 했다는 것이다.
석인해씨는 조정호씨가 통일문학 편집실장으로 있을 때 거기 부원으로 같이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6,7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장소가 어디며 날짜는 언제냐고 물었더니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물으니까 금방 생각이 안 난다고 하는데 몇 번 더 묻다가 멈추었다. 안타까웠다. 나중에 남쪽에서 확인한 조선대백과 사전 자료에 의하면 50년 9월 25일이 사망일로 되어 있고 북쪽 아들 정구인씨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장소는 동두천 소요산 기슭이다. 다만 조정호씨한테 그걸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용악 시인에 대해 물었더니 67년인가 68년인가 그때쯤에 결핵을 앓다가 결핵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낸 ‘평남관개시초‘라는 시집은 연작시인데 북조선 문단의 성과작이라고 한다. 통일문학을 만드는 일에도 7-8년 정도 관여하였다고 한다. 아들은 유명한 화가라고 한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백석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남쪽 문단에서는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로 이용악 백석 정지용 김기림 오장환 등등을 꼽는데 그 중에서 재북작가인 백석을 모른다는 것을 보고 놀랬다. 물론 오장환 시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문인이면서 애국열사릉에 묻힌 작가들로는 소설가 홍명희, 리기영, 시인 리찬, 조기천 등이 있는 걸 확인했다.
사소하게 오고가는 사적인 대화인 듯 한 말속에는 문학사를 쓰는 데 상당히 중요한 말들도 있었다. 한 작가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도 그렇고 분단으로 인해 매몰된 문학사를 다시 발굴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뜻에서도 남북작가들, 학자와 평론가들의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료도 서로 공개하고 교환하며 문학적 논의와 평가가 병행되는 일이 큰 과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문학사를 새롭게 정리한다는 것은 역사, 정신사, 문화사를 다시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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