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향토기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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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향토기업이 없다.
  • 충청리뷰
  • 승인 1997.11.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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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지역경제의 현주소

빈약한 도세에도 전국규모의 향토기업을 가졌던 충북.
그러나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돼 버렸다.
신흥제분 · 일신산업 등 명성 빛바래
향토기업, 한국도자기만 명맥 유지
2세경영체제 ‘착근’ 실패가 주요인 지적

충북에 대표적인 향토기업이 없다.
한때 전국적으로 성가가 높았던 굵직굵직한 향토기업 대부분이 시대흐름에 따라 한계기업에 몰리거나 2세 경영인체제를 성공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함으로써 수성에 실패, 우리 곁에서 하나 둘 시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충북의 대표적 기업으로 꼽을 수 있는 업체는 한국도자기 정도가 거의 유일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몇몇 대표적인 향토기업을 갖고있는 타시도의 처지가 부럽기만한 도민들로서는 일종의 심리적 허탈감내지 공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들어 서민의 술로서 지역에서 40년이상 사랑받아온 백학소주마저 조선맥주에 흡수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과 관련, 도민들은 허탈감과 서운함을 넘어 충격마저 느끼고 있다.

지난 50년대를 시작으로 70년대까지만해도 충북은 빈약한 도세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몇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대표적 향토기업들을 가졌던 행복한 경험이 있다.
신흥제분과 일신그룹 청주방적, 충주비료공장 등이 한때 도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던 대표적 기업들.

신흥제분
종합소득 2위에 오르기도
신흥학원만 명맥유지
신흥제분은 지난 50년대 충북인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 창업주 민철기씨(작고)는 한때 전국에서 종합소득 2위에 오를 정도로 충북 경제계를 주름잡았던 경제인으로 신흥제분을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웠다. 맨손에서 창업해 기업을 일군 민회장은 비록 충북출신은 아니었지만 사업 본거지를 충북에 정항으로써 충북경제계의 상징이 됐다.

민회장은 1958년 충북에서 가장 큰 벽돌공장을 지어 신흥제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음식료품 제조업체도 경영하면서 일취월장, 대전과 인천 서울에 신흥제분 분공장을 세우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런 사업적 성공은 월남전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의 전투식량 납품권을 따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최전성기를 맞은 민회장은 전국에서 종합소득세 랭킹 2위를 달릴 정도로 사세가 당당했다.

민회장은 제조업에서의 성공을 거름삼아 1967년 당시 공화당 육인수 국회의원의 권유를 받아들여 속리산 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아울러 속리관광호텔 경영에도 뛰어들었다. 이어 1968년 청원군 오근장에 청원제사주식회사를 세우고 69년엔 중도석유주식회사를 차림으로써 제조업을 비롯해 운수, 유통, 관광업에까지 사업를 다각화해나갔다.

민회장은 또 농촌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청주시 율량동 일대에 20만평 규모의 과수원과 목장를 조성, 율량동 포도와 복숭아 과수원를 지역의 명물로 만들기도 했다. 이때 “민회장의 땅을 밟지 않고는 이곳을 지날 수 없다”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그러나 대전에 세운 당근주스 공장의 실패와 70년대 불어닥친 오일쇼크 등 내외 환경의 급변이 철옹성겉았던 신흥제분을 흔들면서 쇠락의 조짐이 나타났다. 민회장은 결국 70년대 후반 속리산고속과 관광호텔을 동양고속에 매각한데 이어 결국 84년 신흥제분의 지분까지 완전히 정리함으로써 경제계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신흥제분은 이제 민회장의 장학사업 의지에 따라 세워진 신흥학원만으로 옛영화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일신그룹
일신그룹은 박사호칭으로 더 유명한 고 이도영회장이 세운 기업으로 도민정서에 가장 뿌리깊게 박혀있는 향토기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경제계와 언론계 등에 두루 족적을 남긴 문헌 이도영회장은 다소 이색적인 약력을 갖고있다. 이회장은 경성제대 (지금의 서울대)를 졸업한 수재로 관계진출 대신 ‘돈을 벌기위해’ 삼양사 계열인 경성방직에 취직, 업무부장까지 승진하는 등 기업인의 소양을 닦은 후 사촌형의 사위가 운영하던 충주시 살미면 목벌리 동양활석 광산의 경영참여 제의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인물. 이회장은 공장을 일신산업(주)로 상호를 변경, 기업면모를 일신함으로써 처음부터 기업수완을 인정받으며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성제대 출신 경영인 이회장은 가공한 활석가루를 일본을 비롯, 필리핀, 미얀마(옛 버마), 캐나다, 미국, 남아공에 이르기까지 수출, 기업을 급신장시키면서 당시 귀하기만 했던 외화획득에 공을 세우기도 한 경제인이었다.

이회장은 이같은 사업적 성공에 고무받아 지난 49년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에 있던 통조림공장를 불하받아 남한 제사주식회사를 설립, 생사를 만들어 수출하는 등 기업규모를 키운후 원양업주식회사, 남일건설, 일신 동양통신기(주), 남한제지주식회사, 청주문화방송, 충청일보사를 잇따라 창립하거나 인수하면서 지역 최대 재벌의 하나로 부상했다. 특히 남한제사는 식량이 귀했던 그 시절 청주시내 노점상에서 거의 유일한 단백질원으로 판매되며 사랑을 받던 ‘번데기’를 공급(?)하는 부대역할도 했다.

사회기여도 많이했던 기업 남한제사는 1956년 재산일체를 홍익학원에 기증한 뒤에도 기업활동을 하다 제사업의 사양화로 쇠퇴되면서 73년 남한흥산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뒤 버스터미널 사업을 시작했다. 또 마이크 헤드폰등을 생산하는 한음파도 설립한 이도영회장은 자신의 호를 딴 문헌장학회를 통해 지역인재를 길러냄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소홀히 하지않은 향토업체였다.

하지만 지난 1973년 이회장의 작고후 2세 경영체제가 성공하지 못한데다 적기의 사업구조조정 실패, 충주댐 준공에 따라 활석공장를 수몰로 잃게됨으로써 사업기반을 크게 잠식당한 일신산업의 도태등 으로 한때 충북경제의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일신그룹은 80년대 들어 급속히 형해화되는 비운을 맞았다

청주방적
현재 청주시 상당구청에 자리했던 청주방적(청방이라는 이름 으로 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은 일제시대 군수품 공장으로 로프를 생산하다가 해방후 광목공장으로 변신했으나 여러차례 부도를 겪으면서 한때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고 전응규 회장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순방했을때 경영브리핑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쩌 대통령의 신임과 후원을 받게되면서 회사를 극적으로 살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청방은 이후 대일차관을 얻으면서 탄탄한 성장을 계속, 지역을 연고로한 그룹 이미지를 완전히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부정대출사건 얼룩 진회장은 청방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서울의 대왕코너를 인수해 정상화시켰으며, 경기도 의정부에 이화방직, 서울에 동방섬유를 창업하고 충북은행을 비롯 충북투금 청주개발 태양생명 등 지역 금융기관 설립에 주식을 투자하는 등 향토기업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바로 최전성기였던 70년대 중반이 곧 내리막길이 될 줄은 몰랐다. 청방역사 2세 경영체제로 들어가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충북투금의 부정대출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청방은 이후 우여곡절끝에 지난 95년 (주)심택으로 변신, 현재 꾸준한 기업 활동을 펴고있어 향후 성공여부가 주목된다.

충주비료공장
충주비료공장은 사실 충북의 대표적 향토기업이라기 보다는 충북을 ‘상징하는’ 대표적 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흔히 충비라고 불린 이 회사는 충주지역과 충북의 간판기업를 넘어 전국적인 명성을 유지, 한때 교과서에까지 올랐을 정도였다. 6.25 전쟁이후 국가적 과제로 부상한 식량증산에 필요했던 요소비료를 생산했던 충비는 당시 열악했던 남한경제 의 중화학공업을 이끈 대표적 기업이었다.

한때 중화학공업 선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현대식 요소비료공장 설비를 갖춰 일산 150톤의 암모니아와 250톤의 요소를 생산해냈던 충비는 그러나 1983년 사회와 경제상황의 변천에 따라 조업를 중단, 화려했던 한시대를 마감하고 1985년 새한미디어에 매각됐다.

한국도자기
현재 충북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향토기업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모범적으로 해오고 있는 기업으로 한국도자기가 주저없이 꼽힌다. 그래서 충북경제계의 자랑스런 명예가 되고 있다.
한국도자기는 청주상의 5대회장이었던 김종호회장이 창업한 기업으로, 1943년 충북제도사라는 이름으로 청주시 우암동 청주대학교 옆에서 태동했다. 당시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어서 놋쇠공출로 금속류 식기가 부족했던 때문에 벽돌가마에서 구워내는 생활용기는 불티나듯 팔렸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한국도자기는 1960년대초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 오늘에 이르면서 청주공단 4개공장, 인도네시아 4개 공장 등 8개공장에 7만평의 부지에서 월 350만개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세계적 도자기생산 회사로 발돋음했다.
50년이상 기업을 존속시켜왔다는 사실 하나에서도 드러나듯 한국도자기의 오늘의 성공은 바로 2세경영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한데 그 비결이 있다.

2세경영 성공사례
이점은 우리나라 전체 기업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데, 한국국자기는 창업주의 2세(김동수 회장)가 입사했을 때 말단부터 실무를 배우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 김종호회장은 아들 동수씨에게 출근 첫날부터 회장실 청소를 하도록 했고, 현 김동수회장도 부친의 뜻을 받들어 한푼이라도 절약 하기 위해 일과후 새끼꼬는 일을 자청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이들은 드물게도 건전한 기업가정신을 체질화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건전한 기업정신 필요
기업은 마치 생물체처럼 일종의 유기체다. 그래서 탄생-성장-쇠퇴-사멸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기업들의 생멸 사이클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미국의 코닥이나 독일의 지멘스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업들이 100년이상 수명을 누리며 지금도 세계 최일류 기업으로 커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30년 이상 정상권을 유지하는 기업이 한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않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건전한 기업가정신의박약 2세 경영인의 경영능력 부족 등 해당 기업의 자체 문제에서 연유되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우리는 앞의 몇몇 예들에서도 쉽게 보고 있다.
그래서 이같은 현상이 몇십년동안 진행되면서 결과적으로 충북경제계에 정신적 지주, 즉 어른이 없는 상태를 조장해왔다는 탄식이 일고있는 것이다.

충북이 50-70년대에 누렸던 경제 부흥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인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자 과제가 되고있다. 그리고 기업환경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지역공동체에게도 똑같이 던져지는 화두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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